극단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여자배구 故 고유민 선수의 유족과 소송 대리인은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유족 측은 "고인이 현대건설 구단 내에서 연습에서 배제되는 등 따돌림을 당했다"며 "구단이 트레이드를 미끼로 계약 해지를 종용한 뒤 동의도 없이 임의탈퇴로 묶어 선수 생명을 끝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대건설 구단은 입장문을 내고 반박했습니다. 구단은 "자체 조사 결과 연습 배제 등 따돌림은 없었다"며 "고인은 시즌이 진행 중이던 2월 29일 팀을 무단이탈한 뒤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후 운동을 더 하기 힘들다는 의사 표현을 했고, 연봉 지급을 할 수 없어 계약을 중단했다. 고인이 원하는 트레이드도 시도했지만 성사되지 않았고, 임의탈퇴로 공시할 수밖에 없었다"고 맞섰습니다. 이어 "6월에 구단 관계자가 고인을 만나 복귀 의사를 물었지만,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며 은퇴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고 덧붙였습니다.
한국배구연맹(KOVO) 규약은 물론 스포츠 전반적인 규약에서 '계약 해지'는 '구단과 선수 간의 계약관계 종료'를 의미합니다. 계약이 해지되면 해당 선수는 자유계약선수 신분이 됩니다. 당연히 구단의 임의탈퇴 선수로 묶일 수 없고, 타 구단과 계약도 가능합니다. KOVO 관계자도 "계약 해지 후 임의탈퇴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유족 측 주장이 맞는다면 고인을 '계약 해지 후 임의탈퇴'한 현대건설 구단은 규정을 어겼다는 책임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故 고유민 선수 유족과 소송 대리인이 '계약 해지 후 임의탈퇴'의 증거로 내세운 고인의 모바일 메신저 대화를 보면 의문점이 있습니다. 지난 3월 30일 구단이 제시한 계약 해지 합의서에 사인을 한 고유민 선수가 4월 20일 구단 관계자에게 트레이드를 문의한 겁니다.
"OO님. 저 트레이드 가능하면 해주실 수 있다고 했잖아요. 맞는 곳 있을까요?"
이에 구단 관계자는,
"현재까지는… FA 끝나고 5~6월 사이에 트레이드가 가능하겠지!"라고 답했습니다.
고유민 선수는 지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나 OO님에게 트레이드 해달라고 이야기했는데"라며 "처음에 계약 해지할 때 그랬거든요. 낮은 급이나 좋은 쪽으로 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주겠다고"라고 트레이드에 대한 희망을 언급합니다.
3월 30일부터 고유민 선수는 현대건설 소속이 아니며, 타 구단 계약이 가능한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유민 선수는 '전 소속팀' 현대건설에 자신의 트레이드를 문의했습니다. 여기에 현대건설 구단 관계자는 소속 선수도 아닌 고유민 선수의 트레이드 요청에 긍정적인 답변을 했습니다. 고유민 선수가 지인에게 보낸 메신저 내용을 보면 계약 해지를 하면서 트레이드를 언급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유민 선수와 구단이 '계약 해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문에 대해 추가 취재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계약 해지 후 임의탈퇴'가 배구계의 오랜 관행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여자배구에서 은퇴한 A선수는 "구단에서 임의탈퇴로 묶기 전에 계약 해지를 먼저 종용한다"며 "구단은 '연맹에 보고만 하지 않으면 언제든 계약 해지를 취소할 수 있다'고 하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계약을 해지하면 임의탈퇴로 묶이기 전까지 연봉을 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랬던 거 같다. 최근 몇 년 동안 임의탈퇴로 묶인 선수들에게 연락해보면 대부분은 계약 해지에 합의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선수들은 임의탈퇴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반면 계약 해지에 대해서는 얼마나 사안이 중요한지 모르는 거 같다. 계약 해지를 해도 다시 구단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봤다"고 덧붙였습니다. 한 배구계 인사는 "여자배구는 물론 남자배구에서도 계약 해지 뒤 임의탈퇴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귀띔했습니다.
유족 측과 구단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한 가운데 유족 측은 어제(21일) 현대건설 구단을 검찰에 고소했습니다. 양 측의 팽팽한 진실 공방은 이제 법정에서 가려질 전망입니다. KOVO와 배구계도 움직여야 합니다. 또 다른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배구계의 관행처럼 묵인해 온 '계약 해지 뒤 임의탈퇴' 사례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