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속 택배업계는 때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습니다. 비대면 소비가 확산하면서 당분간 이 택배 특수는 계속될 거라는 게 업계 안팎의 전망입니다. 그런데 이 호황을 떠받치는 짙은 그림자가 있습니다. 바로 과로로 인한 택배 노동자의 연이은 사망입니다.
'올해 들어서만 4명의 택배 노동자가 숨졌다'는 이 건조한 문장은 택배의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얼마나 보여줄 수 있을까요? 지난 4일엔 CJ대한통운 김해터미널 진례대리점 소속 서형욱 택배 노동자가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40대의 나이로 평소 지병이 없던 그는 코로나 이후 폭주한 물량을 버거워했다고 동료들은 말합니다. 서 씨는 숨지기 전 마지막 근무 날, 계단 오르기조차 힘들어 동료들에게 남은 물량을 부탁하고 직접 운전을 해서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게 서 씨의 마지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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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14~15시간 택배 노동…한 달 배송 1만 개
서 씨의 동료들은 서 씨를 참 부지런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했습니다. 항상 가장 먼저 출근해 전기포트에 물을 팔팔 끓여놓고 동료들이 출근하면 커피 한 잔씩 내밀던 사람. 주민들 역시 꼼꼼하고 친절했던 서 씨를 단순한 택배기사 이상으로 여겼습니다. 서 씨는 최근 3개월 동안 아침 7시에 출근해 늦게는 자정이 가까워서야 퇴근했습니다. 하루 300개 이상의 택배 물량을 소화했습니다. 늘어나는 물량에 허덕이던 서씨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눈물지었습니다.
사실 택배 노동자들의 연이은 과로사는 예고됐던 일입니다. 지난 6월엔 만 33세이던 로젠택배 노동자가 심근경색으로 숨졌고, 지난 5월에는 잠자던 CJ대한통운 소속 택배 노동자가 갑자기 숨을 거뒀습니다. 3월에는 쿠팡 배송 노동자가 계단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지만 끝내 숨졌습니다. 코로나19로 물량은 평소보다 30~40%나 늘어났지만, 회사는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기존에도 과로에 시달리던 택배 노동자들이 더 과중한 업무를 하다 보니 안타까운 죽음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겁니다.
●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파리 목숨, '이러다 죽겠다'"
국토교통부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택배업계와 간담회를 열고 기사 충원, 적정 근무체계 마련, 휴게시간 보장 등의 내용이 담긴 권고사항을 내놨지만 현장 노동자는 이를 체감하지 못했습니다.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대신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택배업체들을 사실상 정부가 방관한 셈입니다. 한 택배 기사는 "택배 현장을 잘 모르는 사람은 일을 좀 줄이면 안 되냐고 말하지만, 실제 멈출 수가 없다. 하루 일을 쉬고 싶어도 파리 목숨이라 잘릴까 두렵고, 막상 쉬려고 해도 자신의 배송비 몇 배를 부담하는 상황에서 휴가는 엄두도 못 낸다"고 말합니다. 이대로는 택배 과로사가 또 없으리라는 법이 없다는 얘깁니다.
● CJ대한통운의 '물량 축소 요청제' 도입…"장시간 노동 핵심은 오전 분류 작업"
질타가 이어지자 업계 1위 CJ대한통운은 그동안 택배기사들이 집배점과 구두로 협의하던 관행을 제도화한 '물량 축소 요청제'를 표준계약서에 명문화하기로 했습니다. "택배기사들이 자발적 선택을 통해 배송 물량을 줄이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게 CJ대한통운 측 설명입니다.
하지만 현장 상황과 동떨어진 대책이라는 비판이 거셉니다. 당장 수입이 줄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물량을 줄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또 택배기사들은 각 대리점과 계약을 맺기 때문에 CJ대한통운의 표준계약서가 의무 사항이 아닌 참고사항에 그친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과로의 근본 이유는 줄어드는 건당 배송 수수료와 기사들의 무급 분류 노동 탓인 걸 간과한 대책이라는 게 현장의 목소리입니다.
● "다가오는 '택배 성수기'가 더 걱정"…8월 14일 '택배 없는 날'
코로나 이후 늘어난 물량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가올 9, 10, 11월은 1년 중 택배 노동자들이 가장 바쁜 시기입니다. 코로나까지 겹친 올해는 얼마나 더 힘들어질지 벌써부터 택배 노동자들은 걱정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4개 주요 택배사가 다음 달 14일을 사상 최초로 '택배 없는 날'로 정했다는 겁니다. 택배산업 시작 28년 만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배송 서비스 덕에 우리 삶이 얼마나 편안해졌는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팍팍한 일상의 단비 같은 '택배'가 지금처럼 누군가의 과로에 기댄 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택배 과로사라는 괴이한 단어는 이제 사라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