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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공감 · 위로' 공식입장 아니라는 靑의 침묵

[취재파일] '공감 · 위로' 공식입장 아니라는 靑의 침묵
지난 23일 낮 12시쯤, 청와대 기자실이 확 분주해졌습니다. <靑, 2주 만에 공식 입장 "박원순 피해자에 위로 전한다">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한국일보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청와대 강민석 대변인이 기자와 통화에서 "피해자 입장에 공감한다. 피해자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기사대로라면 청와대가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발표한 첫 입장이 되는 셈입니다. 청와대에선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박 전 시장의 빈소를 방문해 "참 오랜 인연을 쌓아온 분인데 너무 충격적"이라는 문 대통령 언급을 전한 뒤 13일째 무거운 침묵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들은 대변인의 말은 조금 달랐습니다. "청와대의 공식 입장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해 달라"는 질문에 대변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 "침묵이 드디어 깨졌다?"…대통령 아닌 대변인의 '공식 입장'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

"공식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어쨌든 지금, 원래 서울시가 진상 규명 작업을 벌이다가 인권위로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울시든 인권위든 진실규명 작업이 진행될 것입니다. 진상 규명 작업의 결과로 사실관계가 특정이 되면 보다 더 뚜렷하고 적절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게 될 것입니다."


- 靑 강민석 대변인, 23일 오후 청와대 기자회견 中 -


피해자에게 '공감'과 '위로'를 표한 자신의 말이 청와대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대변인이 선을 그은 겁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사실관계가 특정되지 않았음에도 위로를 드린다는 건 여러 2차 가해로 고통을 받는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드린 것"이라고 발언의 맥락을 설명했습니다. 대통령이 이 문제와 관련해 언급한 게 있는지 묻는 질문에는 "대통령의 모든 발언을 제가 다 소개해 드릴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일보도 <강민석 靑 대변인 "박원순 피해자에 위로 전한다">라고 주어를 청와대가 아닌 대변인으로 해서 기사 제목을 바꿨습니다.

 
'대통령의 침묵이 깨졌다'는 소식은 그렇게 일종의 '해프닝'으로 반나절 만에 정리됐습니다. 지난 13일 브리핑에서 '피해 호소인'이라는 표현을 썼던 대변인이 이날은 '피해자'라는 호칭을 줄곧 사용했지만 그밖에 입장이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대변인은 "청와대는 고위 공직자의 성 비위에 단호한 입장이고, 피해자 보호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은 청와대의 원래 입장"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그런 청와대를 향해 이번엔 정의당이 날을 세웠습니다.
 
● "외면과 회피는 책임 있는 모습 아냐…누구 곁에 설 것인가"
 
정의당 조혜민 대변인은 그제(24일) 브리핑을 통해 "청와대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진상규명 결과가 나와야만 공식 입장 표명이 있을 거란 허술한 답변을 일삼았다. 피해자에게 공감의 메시지를 보내다가 선을 긋는 모습에 허탈함을 감출 수 없다"고 꼬집었습니다. 
 
"피해자는 용기 내 고발했으나 또다시 위력과의 싸움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2차 가해가 난무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누구 곁에 설 것인지 명확히 입장을 낼 것을 촉구한다. 외면과 회피는 대통령의 책임 있는 모습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길 바란다."

 
- 정의당 조혜민 대변인, 24일 오후 국회 기자회견 中 -
 
정윤식 취재파일

제 1야당 미래통합당은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6일 "문 대통령이 박원순의 죽음과 관련해 명확한 태도를 표명해 달라"고 요구한 바 있습니다. 문 대통령의 침묵을 지켜보고 있는 건 비단 야당뿐만이 아닙니다. 알려졌듯 미국 CNN 방송은 지난 16일 "한국의 대통령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 그의 세 정치적 동반자들은 성범죄로 고발됐다(South Korea's President says he's a feminist. Three of his allies have been accused of sex crimes)"는 제목의 기사에서 "문 대통령이 박 시장의 죽음과 피해자, 심지어 좀 더 넓은 의미의 젠더 이슈에 대해서도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did not mention Park's death, the alleged victim, or even touch on broader gender issues.)"며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에 이어 박원순 서울시장 사건까지) 모든 세 명의 유력 정치인 고발 사건에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다(Moon has stayed silent on the accusations against all three leaders)"고 보도했습니다.
 
이번 해프닝에서 그나마 새롭게 나온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고 박원순 시장 의혹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끝나면 청와대, 그러니까 문 대통령의 뜻이 담긴 진짜 '공식 입장'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강 대변인이 "적절할 때에 적절한 내용을 전해드릴 수 있을지는 진상 규명 결과가 나와야 될 것 같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를 봐야 한다'는 유보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결과에 따라 침묵이 또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경찰이 '투 트랙'으로 진행 중인 이번 사건의 진상 규명은 아직 결과를 예단할 수 없습니다. 경찰은 고인의 사망으로 공소권이 없어도 진상 규명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습니다. 피해자 측은 이번 주 안에 인권위원회에 이번 사건과 관련한 진정을 제기할 계획이지만 인권위 조사에 강제성이 없어서 출발부터 한계가 있다는 관측도 많습니다.
 
● "피해자들이 2차 피해나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는 나라"

 
정윤식 취재파일

문 대통령은 지난 2018년 2월 26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아래와 같이 얘기한 바 있습니다. 당시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대통령으로서 이를 지지하고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현한 발언이었습니다. 해당 부분을 옮겨봅니다.
 
"우리 사회 전 분야로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곪을 대로 곪아 언젠가는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문제가 이 시기에 터져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우리 정부의, 성평등과 여성 인권에 대한 해결 의지를 믿는 국민의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투 운동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피해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합니다.
 
우선 사법당국은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호응해서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피해자의 폭로가 있는 경우 형사고소 의사를 확인하고, 친고죄 조항이 삭제된 2013년 6월 이후의 사건은 피해자의 고소가 없더라도 적극적인 수사를 당부합니다. 특히 강자인 남성이 약자인 여성을 힘이나 지위로 짓밟는 행위는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어떤 관계이든, 가해자의 신분과 지위가 어떠하든 엄벌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
 
젠더폭력은 강자가 약자를 성적으로 억압하거나 약자를 상대로 쉽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아프더라도 이번 기회에 실상을 드러내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법만으로 해결할 수 없고, 문화와 의식이 바뀌어야 하는 문제인 만큼 범사회적인 미투 운동의 확산과 각 분야 별 자정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도 모두가 존엄함을 함께 누리는 사회로 우리 사회 수준을 높인다는 목표로 근원적인 대책을 마련해 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정부는 공공부문의 성희롱, 성폭력부터 먼저 근절한 다음 민간부문까지 확산시킨다는 단계적인 접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미투 운동을 보면서, 공공부문, 민간부문을 가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됐습니다. 사회 곳곳에 뿌리박힌 젠더폭력을 발본색원한다는 자세로 유관 부처가 범정부 차원의 수단을 총동원해 주기 바랍니다. 특히 용기 있게 피해 사실을 밝힌 피해자들이 그 때문에 2차적인 피해나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 데 대해서도 꼼꼼하게 대책을 마련해 주기 바랍니다."

 
- 문 대통령, 2018년 2월 26일 대통령 주재 수석보좌관회의 발언 中 -
 
● "피해자로서 보호받고 싶었습니다. 이 과정은 끝난 걸까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 지난 22일 기자회견 모습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22일 두 번째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의 입장문을 전했습니다. 피해자는 그동안 2차 가해로 고통 받았지만 자신을 지지해준 이들에게 큰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에 자신을 위로한 건 결국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연대였다고 피해자는 말합니다. 침묵하지 않은 이들의 목소리가 모여 만든 위로가 자신을 살렸다고 피해자는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 대통령의 목소리는 없습니다.
 
피해자는 밝혀진 진실에 함께 집중해주길 부탁한다고 호소했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말하면서도 공식 입장은 아니라는 청와대. 진상 규명의 그날에 어떤 말을 어떻게 할지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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