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잠잠해져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기대를 가지게 된 2020년 4월 29일, 공사장에서 일하던 38명의 시민들은 영영 일상으로 복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천 물류창고 화재참사 사건, 아직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걸 우연히 발생한 화재 사고,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사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 우리는 이런 사고를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지를 되물으며 공사현장에서 흔히 발생하는 상황을 생각해본다. 일반적으로 도급계약에 기재된 공사 마감일이 다가오면 공사를 맡은 시공사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안전을 위해서 여러 공정을 차근차근 밟아가야 하는데 공사 마감일을 준수하지 못했을 때 발생할 지체상여금(하루 지체할 때마다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도록 기재되어 있음) 금액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이 순간 시공사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 앞에 놓인다. 안전을 위해 차근차근 밟아가야 할 공정을 급하게 몰아쳐 공사 마감일을 맞추거나, 아니면 지체상여금을 감수하거나.
이 선택 앞에서 전자보다 후자의 선택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안전사고가 발생할 경우 치러야 할 대가가 지체상여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니 아예 비교할 생각을 말도록 압도적으로 커야 한다. 왜냐하면 지체상여금은 공사마감일이 늦어지면 확실히 지불해야 할 돈이지만 안전사고로 인해 부담해야 할 비용들은 선택의 시점에선 아직 불확실한 예상비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사전 경고가 몇 차례 있었기에 사고 발생이 충분히 예견된 상황에도 시공사는 스스럼없이 안전을 포기하곤 한다. 윤리적 비난만 감수하면 될 뿐 경제적으로는 해볼 만한, 아니 어쩌면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현행 법원에서 내려지는 판결은 산재사업주에게 지나치게 관대한데, 지난 10년간 산재 사망사고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은 비율은 0.5%, 유족들에게 배상해야 할 위자료 기준도 교통사고와 동일하게 사망 시 1억 원에 불과하다.
▶ [인-잇] '산재공화국' 대한민국, 판결 이대로 괜찮나?
'지체상여금 몇 푼 아끼려고 지금까지 사업하며 번 돈을 다 모아도, 평생 모아도 구경할 수 없는 돈을 부담해야 하는 그런 선택을 하다니,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비난을 받을 만큼 그 치러야 할 대가가 막중하지 않다면 우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산재사건이 대한민국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곤 한다. "사업이란게 일정한 리스크를 감당할 수밖에 없는 건데 이렇게 치러야 할 대가가 크면 누가 그걸 감수하고 사업을 하겠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논리와 철저히 타협해 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질문은 모순 덩어리다. 생명과 안전은 한번 침해되면 영영 돌이킬 수 없기에 사업주가 감당하고 말고를 논할 수 있는 리스크의 문제가 아니며, 그 어떤 가치보다 최우선해야 하는 불가침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당연한 진리를 2014년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사건으로 재차 깨달았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린 정말 깨닫기나 한 것일까? 지난 2016년에 만들어진 '존엄과 안전에 관한 4. 16. 인권선언'의 내용을 보면 너무나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2016)
하나.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은 최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돈이나 권력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보다 앞설 수 없다.
대한민국 일터에서는 하루 평균 3명 꼴로 사고를 당해 누군가가 숨지고 있다. 코로나 19라는 전염병마저 극복한 우리라면, 산재사망도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질병관리본부가 매일 코로나 19 확진자를 발표하는 것처럼 국가가 매일 산재 사망사건을 브리핑하고 핸드폰 알림 문자로 통보해 그 경각심을 지속적으로 가지게 해 주면 어떨까?
시민들이 서로 연대하고 협력해서 막아내야 하는 건 코로나 19와 같은 전염병만이 아니다. 산재사망사건도 우리가 연대하고 협력해 반드시 막아내기를, 그 어려운 걸 해냈다고 스스로 칭찬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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