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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무적자④] '행적불명' 무적자, 마지막 길도 혼자

[취재파일-무적자④] '행적불명' 무적자, 마지막 길도 혼자

신분증은 얻었지만…행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

SBS 취재진과 서울시가 함께 찾아낸 무적자 356명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습니다. 분명 살아있지만 사회에선 '살아있다'고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렵사리 비빌 언덕이 생긴 그들의 삶에 극적인 변화가 생겼을까요?

창성창본을 한 356명의 무적자 중 현재 '행적불명' 상태인 사람은 62명. 현재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분들입니다.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기존 요양시설에 있다가 타 시설로 옮겨진 사람, 그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퇴소한 사람.

전자는 그나마 타 시설로 갔으니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한데, 후자는 말 그대로 당사자가 스스로 사회에 뛰어든 거라 땅 속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날아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취재진이 찾아간 노숙인 요양시설, 서울시립 은평의마을엔 그들의 과거 기록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시설을 나간 사람들에 대해 묻자 사회복지사들은 '행선지를 밝히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며 사실상 알기 어렵다는 답을 내놨습니다. 신분증이 생겼으니 '일할 의지와 능력만 있다면 어디서든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과연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을까. 기사에 담지 못한 얘기까지 더 자세히 얘기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찾아봤는데…결과는?

취재진은 이 62명 중 비교적 젊은 나이에 속하는 75년생 조 모 씨와 76년 김 모 씨의 족적을 밟아보기로 했습니다. 불의의 사고나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분명 늦깎이 신분으로 사회의 일원이 되기 충분한 나이였습니다.

서류를 살펴보니 조 씨는 지난 2005년, 김 씨는 좀 더 최근인 2016년 창성창본 절차를 밟아 신분증을 얻었습니다. 특히 김 씨는 한 차례 퇴소 이후 사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건강이 악화돼 다시 요양시설로 돌아온 이력이 눈에 띄었습니다. 적어도 사회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던 겁니다.
(기자) "재활 의지는 확실히 있으셨던 거네요?"
(복지사) "젊으시니까 더 나이 들기 전에 도전을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은 갖고 계시니까요."

이들의 마지막 흔적이 남은 곳은 다름 아닌 서울역. 노숙자들이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곳입니다. 조 씨의 서류상 본적지도, 김 씨가 시설을 나간 후 잠깐 묵었던 고시원도 바로 이 근처로 파악됐습니다. 하지만, 그 외엔 어떤 것도 알 수 없던 상황. '사막에서 바늘 찾기' 느낌이긴 한데 어쨌든 서울역에서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취재진이 들고 다닌 건 김 씨와 조 씨의 사진뿐. 노숙인 분들은 서로의 이름은 모른 채 얼굴로만 기억한다는 복지사분들의 조언을 새겨들었습니다. 이들의 사진을 보여 주며 묻기 전까지도 '과연 흔적을 마주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의구심은 광장서 만난 노숙인들의 반응으로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복지사분들 말대로 이분들은 조 씨와 김 씨의 이름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휴대전화 화면 위 사진을 뚫어지게 볼 뿐이었습니다. 이윽고 '어디서 봤는데?'라는 말이 나오더니 조 씨를 목격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노숙인 1) "내가 저기 너머 공원에서 이 사람(조 씨)을 본 것 같아."
(노숙인 2) "서울역, 저 밑에 보면 여기 지하철 있잖아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내려가는 데 거기 우리은행이 있거든요. 현금 기계, 거기 (조 씨가) 앉아 있더라고. 어제 막걸리 마시고."
무적자 노숙인

또 다른 단서는 '저기 너머 공원'. 남대문경찰서 너머 후암동과 동자동 일대 쪽방촌 근처엔 자그마한 공원이 있는데, 거길 의미하는 것 같았습니다. '설마 볼 수 있으려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역 지하통로를 거쳐 쪽방촌을 찾아가 봤습니다.

여기서도 '봤다'는 얘기가 나온 건 조 씨. 무료로 점심을 제공하는 근처 복지관에 종종 들른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달음에 복지관으로 가봤는데, 안타깝게도 '오늘은 예약하지 않았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행적불명' 상태였던 조 씨는 서울역 근처를 배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김 씨는 어떨까? 조 씨와 달리 5년 전 시설을 빠져나온 김 씨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습니다. 시설 퇴소 후 김 씨가 한 달간 머물렀던 고시원에 가봤지만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아는 이는 없었습니다.

김 씨는 조 씨와 달리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안착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 찰나, 매주 일요일 주말 저녁 서울역 광장의 노숙인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한 목사님이 김 씨를 알아봤습니다. 음식을 줄 때 김 씨를 봤다는 겁니다.
(목사) "네, 제가 여기 목사인데요. 그래가지고 우리 식사할 때 (김 씨가) 온 것 같아요."
(기자) "최근에 보신 적 있으세요?"
(목사) "그러니까 얼마 전에 여기서, 저기 서울역에서 본 것 같아. 이 동네에서 본 게 아니고."
(기자) "상태가 어땠어요?"
(목사) "그렇지. 노숙을 하니까."
(기자) "노숙을 하시는 것 같아요?"
(목사) "예. 노숙하는 것 같았어요."

김 씨가 역 근처에서 노숙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차림새로 봤을 때 노숙자로 보였다는 게 목사님의 증언이었습니다. 김 씨도 조 씨와 마찬가지로 역 근처 어딘가에 있는 듯했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하진 못했지만요.

분명 두 사람 모두 신분증이 생겼지만, 그들의 삶에 극적인 변화는 없었습니다. 거리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취재진은 두 사람이 사망했다는 어떤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살아있다'는 건데, 아직 희망은 있었습니다.

창성창본, '그 후'도 필요하다

무적자 민증

취재진이 찾은 서울시립 은평의마을은 노숙인들을 위한 요양시설입니다. 시설에선 공공기관, 시민단체 등의 요청으로 건강이 악화된 노숙인들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숙인들 중 신분이 없는 무적자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복지사분들에게 창성창본 절차를 밟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최소 수개월의 시간이 걸리고, 증거자료를 모으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당사자가 장애가 있다면 '내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사분들이 창성창본 절차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무적자들에게 신분증을 쥐어줘 사회 안전망 내로 끌어들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투표, 계좌 개설 등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할 수 있는 사소한 일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이젠 다행히 기초적인 복지 혜택이라도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 상황에서도 요양시설서 일하는 복지사분들은 무적자들을 건강하게 돌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립할 의지는 있어도 어떻게 자립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듯했습니다.

이들을 옆에서 지켜본 복지사들은 규범 밖의 삶에 익숙해진 탓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주변서 어떻게 신분증이라는 '물고기'는 잡아서 쥐어줬는데, 정작 스스로 물고기를 잡진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자활 의지를 가졌던 김 씨 역시 자립에 실패한 건지 모릅니다. 356명의 무적자 중 자립에 성공한 건 단 한 명뿐입니다.

이는 무적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젠 아닙니다. 분명 은평의마을에선 성심성의껏 시설에 찾아온 노숙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의 복지사들이 이 많은 노숙인들의 삼시 세 끼와 건강 상태를 확인합니다. 분명 시설에서 지낼 땐 잃었던 건강도 되찾고, 희망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사회에 나오게 되면 이는 눈 녹듯 사라집니다. 그러곤 다시금 시설의 문을 두드리는데요. 이를 두고 '회전문 현상'이라고 합니다. 햄스터가 챗바퀴를 타듯 노숙인들은 시설에서 거리, 다시 시설로 끊임없이 돌고 돕니다. 물고기를 스스로 잡질 못하니 계속 주저앉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겁니다.

삶의 마지막 길도 '혼자'


살짝 경로를 틀어서 마지막 길도 얘기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고, 적어도 자신이 스러져가는 존재가 되면 누구든 슬퍼해줍니다. 하지만, 무적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어렵사리 신분증을 얻었지만, 이를 얻음으로써 따르는 권리를 거의 누리지도 못한 채 숨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가 기사에 적어둔 것처럼 사망자 57명 중 어떤 이는 창성창본한 지 1년 만에 숨지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길도 홀로 걸어갔습니다. 사망자 57명 중 대부분이 사회에 연고가 없는 무연고 장례로 생의 마지막 행사를 마감했습니다. 무적자들은 홀로 세상에 와서 홀로 다른 별로 떠나는 존재가 됐습니다.

무연고자 장례식

그럼 이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로하는 사람은 없을까.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선 무연고자들을 위한 공영장례가 자리합니다. 서울시 역시 지난 2018년 5월부터 공영장례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아는 이가 없었던 만큼 그 절차도 간소했습니다.

취재진이 돌아가신 두 분의 무연고자를 위한 공영장례를 참관했습니다. 15분 안팎의 애도 이후, 준비된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함을 받아 들기까지 3시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유골함은 서울시가 마련한 공영장례 추모장소에 보관됩니다. 눈으로 본 공영장례 추모장소는, 참으로 비좁았습니다.

한 벽면에 유골함 96개, 양 벽면을 합치면 한 칸 당 192개의 유골함이 자리했습니다. 일반적인 납골당에서 볼 수 있는 사진이나 편지, 꽃도 볼 수 없이 회색빛의 장소였습니다. 이들은 올 때도 혼자, 갈 때도 혼자라는 생각에 일순간 서글퍼졌습니다. 그나마도 5년 뒤엔 산골 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위로했으니 다행이다', '왜 무적자들을 보살펴야 하냐'라는 질문이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현안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무적자'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릴지 모르겠습니다. 사회에 남은 기록은 없다시피 할뿐더러 관심 주는 이도 없는데 말입니다.

현명한 답은 아니지만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됐을 수도 있다고. 다행스럽게도 누군가가 나의 유년기를 보호해 줬고, 사회 규범 안에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해 줬다고. 또, 내가 사망해도 울어주고 기억해 줄 사람이 있다고. 운 좋은 줄 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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