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메이지대학 평화교육 노보리토연구소 자료관(이하 자료관)과 다큐멘터리 '육군 노보리토 연구소'의 쿠스야마 타리유키 감독의 적극적인 취재협조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노메이지 연구소는 1940년 전후 세균전 및 독극물 연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941년부터는 중국에 있던 731부대와 함께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당연히 인체 실험도 있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인 1948년 누군가 도쿄 제국은행에서 은행원 10여 명을 독극물로 살해하고 돈을 빼돌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일본 경찰은 노보리토 연구소의 전 연구원을 불러 독극물에 대해 조사를 합니다. 이 연구원은 자신의 독극물 연구 과정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처음에는 싫었지만, 점차 익숙해지면서 취미처럼 돼버렸다. 상대는 중국인 포로였다. 반시뱀의 독을 침에 넣어 옷 위에 찌르니 곧바로 쓰러진다. 시체는 곧바로 해부해 연구에 썼다."
그런데, 이렇게 위험한 독성 세균과 해충을 실제로 '살포'하는 실험은 우리나라에서 이뤄졌습니다.
위 명령서의 작성 시기는 1943년 12월9일입니다. 세균의 활동이 둔화되는 겨울이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당시의 실험 내용을 담은 구체적인 지도도 남아 있습니다.
1942년 과달카날 전투 이후 사실상 태평양의 제해권을 잃은 일본군은 전세를 뒤집을 묘안이 필요했습니다. 항공모함도 전투기도 부족한 상황.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열기구 모양의 풍선에 폭탄을 실어 미국 본토까지 띄어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15kg의 일반 폭탄과 불을 일으키는 1개의 소이탄 정도를 싣기로 했습니다. 1943년 제작된 열기구의 크기는 대략 아래 사진 정도입니다.
인명 피해는 딱 한 건이 있었습니다. 소풍을 나왔던 목사와 임신한 아내, 그리고 교회 어린이들이 딸에 떨어진 풍선 폭탄을 건드렸다가 6명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1996년 풍선 폭탄 제작에 참여했던 일본인들이 해당 지역을 방문해 사망자 묘비에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풍선 폭탄은 원자폭탄을 제조중이던 미국 워싱턴 주 핸포드 핵연구소에도 떨어져 원자폭탄 완성이 사흘 정도 늦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군이 우리나라에서 실험한 가축 전염병 세균을 풍선 폭탄에 탑재하지 않기로 한 이유는 뭘까요? 자료관 측에 따르면 육군 수뇌부 내부에서 "이미 전황이 기운 상황에서 세균전 공격으로 인해 자칫 미군의 강력한 보복 공격에 직면할 수 있다"는 반대 의견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 풍선 폭탄도 실패하고, 이제 일본의 패망이 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노보리토 연구소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리고, 오늘날 메이지대학 내 노보리토 연구소 자료관에는 어떤 사람들이 찾아올까요? 마지막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