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맥스 스크린을 통해 3D로 보는 배트맨과 슈퍼맨의 1대1 맞대결은 기대했던 대로 웅장하고 박진감이 넘쳤습니다. 무엇보다, 늘 악에 맞서 싸우던 두 히어로가 악이 아닌 서로를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니, 그 자체로 정말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거야말로 슈퍼 히어로판 ‘세기의 대결’입니다.
영화라고는 하지만, 인간인 배트맨과 외계에서 온 초월적 존재 슈퍼맨은 애당초 ‘계’가 다릅니다. 이세돌 9단이 속한 ‘인간계’와 알파고의 ‘인공지능계’가 다르듯 말이죠. 그래서 예고편은 이 대결을 ‘신과 인간의 대결'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신과 인간의 대결이라는 틀에서 두 ‘세기의 대결’을 비교한다면, 이세돌 9단은 당연히 배트맨에 더 가까울 겁니다. 같은 인간이니까요. 반면, 인간의 계산 능력과는 비교 할 수 없는 컴퓨터들의 연합체 알파고의 능력은 가히 ‘슈퍼급'입니다.
배트맨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첨단 무기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배트맨의 능력은 사이언스와 테크놀로지의 집합체입니다. 반면 슈퍼맨은 말 그대로 맨주먹뿐입니다.
철갑 투구 같은 투박한 수트를 입은 배트맨은 생김새조차 흡사 로봇 같습니다. 반면, 울퉁불퉁한 근육선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쫄쫄이 수트를 입고 촌스러운 빨간 망토를 펄럭이는 슈퍼맨은 훨씬 더 인간스럽습니다. 촌스런 인간미에 정점을 찍는 정겨운 빨간 팬티를 벗어버린 게 영 아쉽긴 하지만 말이죠.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이 열렸던 대국장 풍경 역시 이세돌=슈퍼맨, 알파고=배트맨 조합에 한 표를 더하게 합니다. 이 9단은 다섯 번에 걸친 대국 내내 혼자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반면 알파고에겐 명령만 내리면 시키는 대로 척척 알아서 돌을 놔 주는 ‘대리 기사’가 있었죠. 배트맨에게 충직한 집사 알프레드가 있듯이 말입니다.
이세돌 9단을 할리우드 오락 영화 속 캐릭터들과 비교하는 게 너무 장난스럽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비교에 억지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굳이 무리일 수 있는 비교를 해 보는 건 두 ‘세기의 대결’ 사이에 적잖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승자가 누가 될지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영웅이 싸우는 이유는 공개됐습니다. 출발은 슈퍼맨에 대한 배트맨의 불신입니다.
영화 속에서 배트맨은 힘과 권력은 언젠가는 타락할 수 밖에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슈퍼맨도 언젠가는 타락할 것이라는 의심으로 이어집니다.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슈퍼맨이 악의 편으로 돌아선다면 인류는 끔찍한 재앙을 맞게 될 것이 뻔합니다. 공포에 휩싸인 배트맨은 결국 선제적으로 슈퍼맨을 제거하러 나섭니다.
인간과 컴퓨터의 ‘세기의 대결’을 앞두고 ‘인류’는 이 9단의 ‘전승’을 낙관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저 ‘팬심’일 뿐이었던 ‘예측’은 뚜껑을 열자마자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첫 대국에서 이 9단이 충격의 불계패를 당하자 인류의 낙관은 순식간에 끔찍한 비관과 공포로 변했습니다. ‘충격의 패배’가 ‘2연패’, ‘3연패’로 이어지면서 비관과 공포는 ‘패닉’ 수준으로 확산했습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컴퓨터가 인간보다 계산을 잘 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엄청난 컴퓨터들의 집합체인 알파고가 인간보다 더 빨리 더 정확하게 확률과 수를 계산하는 건 놀라울 게 없습니다. 오히려 당연히 인간이 이길 거라고 믿었던 인류의 교만이야말로 놀랄 일입니다.
애당초 ‘계’가 다른 인간과 컴퓨터의 대결입니다. 시작부터 상대가 유리했던 불공정 게임입니다. 그런 대결에서 졌다고 막연한 불안과 공포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두려워할 일입니다. 슈퍼맨의 능력이 초월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슈퍼맨 때문에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배트맨의 공포가 두 슈퍼 히어로의 소모적인 전쟁으로 이어지는 걸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