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생각해보자. 일본 정부가 '도의적인 책임'이란 말에서 도의적인 표현을 빼면 정말 책임을 인정하는 것일까? 도의적이란 말이 들어가서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가 '해결'이 안 된 것일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도의적'이란 말 대신 '법적'이란 수식어가 '책임' 앞에 들어가면 지금까지의 고통과 분노가 눈 녹듯 사라지고 상처받은 명예와 존엄이 회복되고 가해자 일본을 선선히 용서할 수 있을까? '지원'이란 말 대신 '배상'이란 표현을 썼다면 피해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의 돈을 흔쾌하게 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소녀상을 이전하는데 찬성할까? 이에 대한 답 역시 아닐 것이다!
묻는 방식을 달리해보자. 24년이 넘도록 한·일 두 나라가 끌어온 위안부 문제가 '어떻게' 해결된 것인가를 묻는 대신 '왜' 최종적으로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는지 물어보자. 책임을 통감하고 사죄한다는 표현, 이미 여러 차례 들어서 닳고 닳은 느낌만 주는, 그래서 획기적이랄지 신선한 느낌은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이 표현이 갑자기 무슨 마술을 부린 걸까?
답은 여러가지로 할 수 있다.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이 해가 가면서 세상을 뜨는 분들이 많으니 한 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도적 차원의 동기도 있을 것이다. 일본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정말 마음을 바꿔서 진심으로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의 뜻을 밝혔기에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미국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이 한·일 두 나라에 작용했다는 분석도 물론 가능하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핵심인가? 답은 간단하다. 위안부라는 이슈가 효용이 다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것이 더 이상 정치, 외교적으로 득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우리 정부가 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달라진 것은 없다. 기시다 외상이 말한 것처럼 이번에 일본이 잃은 것이라면 10억 엔이다. 우리 돈으로 백억 원 남짓한 돈이다. 일본 정부로서는 푼돈이다.
2년 전에 여성의 인권보호를 위해 30억 달러, 우리 돈으로 3조 원 이상을 내놓겠다고 밝힌 아베 총리다. 그런 사람이 골치 아픈 위안부 문제를 돈으로 해결할 수만 있었다면 1백억 엔인들 내지 못했을까. 그러니 달라진 것은 일본이라고 보긴 어렵다.
우리 정부가 달라진 것이다. 과거사 문제에 언제까지 매달릴 수만은 없다는 말은 맞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데 언제까지 눈 흘기고 시선을 애써 외면하면서 지낼 수는 없다. 이제는 해결을,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듭을 지을 때가 된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외교 협상에서 일방적인 승리는 불가능하니 저쪽 입장과 우리 입장을 절충해서 해법이라고 내놓은 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다. 국가간 교섭에서 개인의 감정이나 정서, 처지가 고려될 여지는 거의 없다. 외교는 차가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어제 합의문을 사전에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보여드리고 '이렇게 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면 '그래 이정도면 됐어' 했을 할머니가 과연 몇 분이나 계셨을까? 몇십 년을 이 문제에 매달려온, 그래서 어찌보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관계자들에게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시죠라고 말했다면, 이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해결이 가능했을까? 지금 장난 하는 거냐는 반박이 바로 날아오지 않았을까? 피해자 할머니들과 사전 논의나 문안 조율이 없었다는 것은 정부의 방침이 정해졌다는 뜻이다.
외교는 말장난이다. '방침이 정해지면' 몇 마디의 수식어를 넣고 빼고, 비슷한 뜻의 단어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고 말하는 형식과 발언의 주체를 누구로 할지 따지고 언제 말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 그것이 외교의 본질이란 것을 이번 한·일 위안부 협상은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보여줬다. 그러니 외교적 수사가 당사자들에게 위안을 줄 리도 없다.
정부라는 차는 떠났다.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 대다수는 내려놓은 채. 그 버스가 가려는 방향이 맞지 않다고 내렸지만, (내려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정부라는 버스는 떠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긴 채 말이다. 내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는 또 열릴 것이다. 남은 이들이 모인 자리가 될 텐데, 엄동 속 그들의 목소리가 쓸쓸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