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다. 대법원장의 임기는 6년이다. 대법원장과 대통령이 임기를 함께 마치기 어려운 구조다. 따라서 집권 세력이 교체되면 이전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과 새 대통령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형성된다. 특히 대법관 제청이 문제가 된다. 부드럽게 넘어간 적이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갈등 사례는 이번에 벌어진 대법관 재제청 요구 사태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사용했던 타협 방식을 조희대 대법원장도 시도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달랐다. 이용훈은 성공했지만 조희대는 실패했다.
이용훈은 대법관 제청 갈등을 어떻게 해결했나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 과정은 원만하지 않았다. "대법관 제청만 없으면 대법원장 할 만하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법원도서관이 발간한 구술 회고록에서도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대통령과) 의견 차이가 많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다만 "그 차이를 서로 조정하면서 해결해 왔지요."라고 밝혔다. (『대한민국 법원 구술총서 9. 법관의 길 이용훈』 중) '재제청 요구'같은 파국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어떻게 갈등을 해결했던 것일까?
'이용훈식 해결책'에 대해서는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라는 책에 구체적으로 설명돼 있다. 권석천 작가(전 중앙일보 논설위원)가 이용훈 전 대법원장 인터뷰 등을 토대로 쓴 책이다.
2009년 8월 김용담 전 대법관의 후임을 정할 때의 일이었다. 청와대가 강력하게 희망했던 후보가 있었다. 길기봉 당시 대전지방법원장이었다. 그러나 길기봉 법원장은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현행 '대법관 후보 추천위원회'의 전신)에서 추천받지 못했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뜻이었다. "청와대에서 요구하는 대법관 카드를 그대로 받는다는 것은 대법원장의 제청권, 나아가 사법권 독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청와대가 요구한 인물이 추천 후보군에 포함되면 제청 과정에서 "대통령과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으니 아예 대법관제청자문위의 추천 단계에서 배제한 것이다. (이상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에서 인용.)
청와대는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제청 일정이 계속 미뤄졌다. "대법관 제청 문제로 대법원장을 만날 이유가 없다. 대법원은 앞으로 대법관 후보를 서면으로 제청하라"는 반응까지 나왔다. 김용담 전 대법관 퇴임일까지도 후임 대법관이 임명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결국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가 추천한 후보자는 권오곤, 정갑주, 이진성, 민일영. 총 4명이었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이 가운데 현직 법원장급에 해당하는 3명 중 한 사람을 대통령이 고르라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대통령이 3명 중 누구를 고르든 그대로 제청하겠다는 것이었다. 권석천 작가는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청와대에 와일드카드를 준 셈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법원장이 제시한 3명 중 민일영 당시 청주지방법원장을 골랐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나 민일영 법원장을 대법관으로 제청했다. 파국을 막은 것이다. 당시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대법관 제청에 자리를 걸지 않으면 대법원장 역할을 해내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용훈식 해결책' 시도한 조희대…결과는 달랐다17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최근에도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 아닌가? 그렇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이재명 대통령을 상대로 시도한 방법이 바로 '이용훈식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용훈 전 대법원장 때와 달랐다.
지난 2월, 대법관 후보 추천위원회는 노태악 전 대법관 퇴임을 앞두고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후임 대법관 후보 4명을 추천했다. 윤성식, 박순영, 손봉기, 김민기였다. 청와대는 김민기 수원고법 부장판사의 제청을 강력하게 희망했다. 하지만 조희대 대법원장은 김민기 부장판사를 제청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공식적 이유는 김민기 부장판사의 남편이 이재명 대통령이 임명한 오영준 헌법재판관이라는 점이었다. 부부가 대법원과 헌재의 '최고법관' 자리를 나눠가지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원 안팎에서는 17년 전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그랬듯이 "청와대에서 요구하는 대법관 카드를 그대로 받는다는 것은 대법원장의 제청권, 나아가 사법권 독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 아닌가"라는 것이 진짜 이유라는 분석이 나왔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이용훈식 해결책'을 제시했다. 제청 논란 초기 국면이었던 2026년 3월 3일에 나온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 측은 1순위 김민기, 2순위 박순영을 제시했고, 대법원장 측은 1순위 윤성식, 2순위 손봉기를 제시했다고 한다. 이후 대법원장이 청와대 뜻이 그렇다면 박순영 부장판사를 제청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청와대가 김민기 부장판사를 제청해 달라는 요구를 이어가면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청와대가 콕 집어 요구한 김민기 부장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3명 중 대통령이 누구를 고르든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혔던 셈이다. 17년 전 이용훈 전 대법원장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이용훈식 해결책'이 실패한 후 일이 더 꼬였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제시한 3명 중 2명에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윤성식 부장판사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사건 등을 담당하는 내란전담재판부 재판장으로 지정되었다. 내란 사건 담당 재판장을 대법관으로 지명하는 것은 생각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박순영 부장판사는 현직 중앙선거관리위원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법관이 선관위원직을 맡는 것이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난 6월 지방선거 직후 선관위를 둘러싼 문제가 불거졌다. 특검도 도입됐다. 조희대 대법원장 측은 이 때문에 박순영 부장판사를 제청하기도 곤란해졌다는 입장을 청와대 측에 전했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대통령 요구대로 김민기 부장판사를 제청하느냐, 아니면 대통령과 합의 없이 손봉기 부장판사를 제청하느냐였다. (제3의 방법으로 후보군을 새로 정하기 위해 대법관 후보 추천위원회를 다시 여는 방법도 법원행정처장이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법원행정처장은 추천된 후보 4명에게 연락해 자진 포기 의사를 물었지만, 일부 후보의 반발로 없었던 일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더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두 가지 선택지 중에 대통령과 합의 없이 손봉기 부장판사를 제청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후 벌어진 일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타협 거부하고 각자 권한 행사…'재제청' 절차는 대법원장이 선택할 문제이용훈 전 대법원장과 조희대 대법원장이 처했던 상황은 비슷했다. 두 사람이 제시한 해결책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파국을 막는 데 성공했고, 조희대 대법원장은 실패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관계보다 이재명 대통령과 조희대 대법원장의 관계가 훨씬 험악하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국정 장악력이 과거 대통령들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17년 전 대통령은 받아들였던 타협안을 지금의 대통령은 수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타협을 선택하는 대신 대법관 임명을 거부한 행위가 헌법 위반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적 권한 관계만 따지면 대법원장이 제청한 인물의 대법관 임명을 대통령이 거부할 수 있다고 보는 해석이 더 유력하다. (다만, 청와대가 '임명 거부'와 '제청 반려'를 구분해서, 임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절차적 하자를 이유로 제청을 반려한 것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헌법적 문제가 발생한다. 청와대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전 합의의 부재'를 절차적 하자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임명을 거부할 수 있을 뿐이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 행사 범위를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청와대 요구대로 기존 추천 후보 3명 중 1명을 '재제청'하든, 아니면 대법관 후보 추천위원회를 새로 구성해 새로운 후보군을 추천받은 후 제청하든 대법원장이 선택할 문제이다. 강요할 수 없다. 이 역시 헌법적 권한이다.
'민주적 정당성'과 '사법 독립' 조화 필요…'내로남불'은 걸러야대법관 제청과 관련해 '민주적 정당성'과 '사법의 독립'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조화시킬 방안을 고민할 필요는 있다. 사법부에 대법관 제청권을 주는 것은 우리나라 제도의 특징이다. 대통령 권력이 사법 독립을 침해하는 일이 많았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다. 그러나 선출되지 않은 사법부에 제청권을 주는 것은 민주적 정당성 측면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사법 독립이라는 가치를 중시해 사법부에 제청권을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대법원장 개인에게 주는 것에는 문제가 많다는 주장 역시 타당하다. (1972년 이전에도 사법부에 대법관 제청권이 부여돼 있었지만 대법원장 개인이 아니라 "법관회의" 등이 행사했다.) 입법, 행정, 사법의 구성원이 함께 참여하는 기구에서 제청권을 행사하는 것이 민주적 정당성과 사법의 독립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대안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개헌 논의가 이뤄진다면 검토해 볼 만하다.
다만, 지금 당장 걸러내야 할 사람들은 있다. '상대 편'이 대통령이고 '우리 편'이 대법원장이면 '사법의 독립'을 강조하고, '우리 편'이 대통령이고 '상대 편'이 대법원장이면 '민주적 정당성'을 앞세우는 자들이다. 불과 몇 년 전 김명수 전 대법원장과 윤석열 전 대통령이 대법관 제청을 놓고 갈등했을 때 사법의 독립을 강조하며 대통령을 비판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요즘 민주적 정당성을 외치며 대법원장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배제한 후에야 합리적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토론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