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집단으로 생산하고 분배를 받는 협동농장 시스템은 전통적으로 효율이 높지 않았습니다. 나 혼자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더 많은 것을 분배받는 것이 아니니 공동체의 그늘에 숨어 적당히 일하고 시간만 보내자는 식으로 흘러가기 일쑤였던 것입니다. 협동농장보다 개인 텃밭의 생산성이 높았던 것은 공동생산의 비효율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강제하는 협동농장 시스템이 사라지면 개인 소유를 바탕으로 하는 개인이나 가족 영농 시스템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에서 보는 일반적인 관측이었습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서독에서도 동독의 협동농장 시스템을 해체하면 동독 농민들이 개인 영농을 선호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로 그 반대였습니다. 선택의 공간이 열린 상황에서 동독 농민 상당수는 개인이나 가족 영농이 아니라 집단 영농 시스템을 선택했습니다. 동독 시절 약 4,500개의 협동농장 가운데 약 3,000개가 집단 영농 법인으로 전환됐던 것입니다.
협동농장은 단순한 일자리가 아니라 삶의 공간
동독의 협동농장, 즉 LPG(Landwirtschaftliche Produktionsgenossenschaften)는 농민들에게 단순한 일자리를 넘어 삶의 공간 그 자체였습니다. 농민들은 LPG에서 먹고 잠자며 다른 주민들과 공동생활을 했고, 집을 고치거나 잔치를 할 때도 LPG 차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일을 하러 갈 때 아이를 맡아주는 탁아소를 운영하는 것도 LPG의 몫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체제가 바뀌었다고 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공간을 개별적으로 떠난다는 것이 동독 농민들에게는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통일이라는 사회적 격변기에 개인이나 가족농을 선택했을 경우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확실했다는 점도 동독 농민들이 기존 LPG 시스템에 머물게 된 중요 원인이었습니다. 앞날을 섣불리 예상하기 힘든 변화의 시기에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선택을 하게 마련입니다. 사회주의 성립 당시 강제로 집단화됐던 농업이 통일 이후에도 조합원들의 자발적 결정으로 집단 영농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일부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경쟁력 가지게 된 구동독 지역 농업
물론 이러한 과정이 모두 순탄하게만 진행됐던 것은 아닙니다. LPG가 새로운 집단 영농 형태로 변모하면서 가장 크게 불거진 문제는 인력 감축이었습니다. 동독 지역은 실업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의 특성상 모든 부문에서 인력이 과다 고용된 상태였는데 농업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규모 인력감축이 이뤄져야 했습니다.
또, 협동농장을 탈퇴하려는 사람들과 협동농장 발전을 위해 일정 규모의 협동농장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도 빈번했습니다. 동독 시절 LPG 간부가 새로운 영농법인에서도 경영책임을 맡게 되면서 통일 이후 수년 내지 수십 년 뒤 엄청난 이윤을 남긴 것도 문제로 지적됩니다. 우대 가격으로 영농법인의 토지를 매입한 뒤 엄청나게 오른 땅값으로 시세차익을 봤기 때문입니다.
북 통합시 북한 농민들의 선택은
북한 농민 상당수가 집단 영농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동독의 경우와는 절차상의 차이가 생기는 부분은 있습니다. 동독은 LPG로 집단화를 추진하면서도 개별 구성원들의 사유재산권을 유지했기 때문에 LPG를 대상으로 사유화를 추진할 필요가 없었지만, 북한의 경우 사적 소유가 사라졌기 때문에 일단 농민들에게 개별적인 사유화를 시키는 과정을 거친 뒤 개별 영농을 할지 출자 형식의 집단 영농을 할지를 선택하게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차피 21세기의 농업은 경쟁력 있는 특용작물을 재배하지 않는 한 가족농으로는 승산이 없기 때문에, 북한 농민들 스스로 집단 영농을 선택하든 남한의 영농 법인이 북한에 진출하든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독일의 경우 서독 지역의 농민들이 농지를 인수하기 위해 구동독 지역으로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고 합니다.
북한 농민들이 스스로 집단 영농을 선택하게 되더라도 과다고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력감축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북한 지역의 전반적 개발을 위해서라도 북한의 농업인구 비중은 줄어들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