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근처에 길이 나면 사람이 몰리고 그 덕분에 장사가 잘 되며 부동산 가치가 올라가 가계를 튼실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그래서 길이 난다는 건 모두에게 좋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길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동네에 길이 났는데 그 옆에 더 큰 길이 생겼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선거 때마다 큰 길을 내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SOC 투자로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며 해마다 고속국도 건설계획이 발표됐다.
동네 주변에 길이 더 많이 생겼는데, 이상하게 동네는 활력을 잃어갔다. 예전에는 길이 나면 사람이 몰렸는데 이번엔 왠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외지인 방문도 줄어갔다. 큰 길이 생기고 나서 어딘가는 상권이 살아났다고 하는데 우리 동네는 몰락했다고 한탄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길이 났다고 무조건 좋아하던 시절이 지난 것이다. 새 길의 끝단에 여행객이 몰리면서 그 주변이 쾌재를 울리는 이른바 '분산효과'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대도시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현지에서 이뤄질 소비가 대도시로 옮겨가 버리는 이른바 '빨대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새 길 때문에 찬밥 신세가 돼 교통량과 유동인구가 크게 줄어든 옛 길에선 더 심각한 지역경제 침체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완전개통 1주년을 맞은 서울양양 고속도로 때문에 교통량이 70% 이상 줄어든 44번 46번 국도의 경우다.
이들 도로들은 예전 휴가철엔 속초를 비롯한 강원 동북부로 피서가는 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런데 지난 7월부터 서울-양양고속도로 가운데 동홍천에서 양양까지의 구간이 추가 개통하면서 옛 도로의 교통량은 급감했다. 교통량이 줄면서 경로 상에 있는 휴게소들의 매출 역시 70% 이상 줄었고, 옥수수나 황태 같은 농수산물을 팔던 인근 주민들도 큰 타격을 입었다.
이렇게 새 도로가 뚫리면 옛 도로나 그 주변지역이 반드시 손해 볼 수밖에 없는 현상은 우리나라 도로 설계방식의 특성에서 비롯됐다. 속도를 최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새 국도가 설계되면서 불가피하게 지역을 서로 차단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전국적으로 도로건설이 완성단계에 들어선 만큼, 이제는 새 국도 건설에 따라 침체되거나 단절된 지역경제의 회복을 위해 신경을 써야 될 때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 방법으로 우선 옛 도로의 경쟁력 있는 명소를 잘 알리고 쉽게 찾아갈 수 있게 연계 시스템을 보완해야 한다.
이와 함께 중장기적으론 인구학적 관점에서 도로설계에 접근할 시점이 됐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지역경제 침체에다 인구감소를 감안해 일본처럼 기존 도로 주변의 쇠락한 동네를 정리하고 특정 지점에 새 주거단지를 만드는 작업에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