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멕시코월드컵 이후 언제나 그 무대에는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니 좀 멀게 잡으면 198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까지도 사실 월드컵 탈락이 주는 충격이나 공포를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 지금의 10대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20대와 30대 중반의 세대들에게 월드컵에 출전하는 우리 국가대표팀을 보는 것은 당연히 주어지는 혜택이었던 셈입니다.
이 대목에 '혜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우리 위의 세대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범근이 있으면 월드컵에서 우승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시대를 살았던 부모 세대 그리고 더 윗세대의 어른들에게 월드컵은 언제나 남의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그저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우리와는 아주 상관없는 일.
그랬던 것이 어느 시점 이후 무려 30년 넘게 당연한 일이 된 것은 바로 그 부모 세대들이, 우리의 어른들이 월드컵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안방에서 두 번이나 월드컵을 개최했고, 아이들에게는 꿈이 있으면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 축구가 이렇게까지 발전한 데에는 수 많은 레전드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지](http://img.sbs.co.kr/newsnet/espn/upload/2017/06/16/30000572386.jpg)
지극히 예상가능한 질문이었지만 "남아공 월드컵 이후 대표팀을 은퇴하는 것은 너무 빠른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이런 대답을 남겼습니다. "만약 내가 브라질월드컵에서도 대표팀 명단에 들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대표팀이 더 이상할 것 같지 않나?" 우문에 가까운 호소에 정직할 정도로 원론적인 현답이 돌아와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더 좋은 대표팀이라면, 4년 뒤에는 박지성의 자리에 뛸 누군가를 찾아내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한국 축구는 현실적으로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월드컵 탈락'의 공포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해 본 적 없는 미지의 무언가와 마주할 때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고 합니다. 공포영화에서 관객이 더 큰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은 공포의 대상이 등장했을 때가 아니라 등장하기 바로 그 직전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수의 세대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미지의 공포, 월드컵 탈락위 위기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으니' 정말로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어쩌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 충격에 담담히 대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과거가 되고, 과거는 종종 망각과 이어진다는 것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망각을 반복하는 인간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미지](http://img.sbs.co.kr/newsnet/espn/upload/2017/06/16/30000572387.jpg)
홍명보 감독을 국가대표팀 사령탑 자리에 앉힌 뒤 실패자의 낙인을 찍고 재기불능의 지도자로 바꾼 것은 선택과 선택이 이어져 나온 결과이지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감독 선임을 주먹구구식으로, 집행부의 입맛에 맞게 진행해 온 협회의 선택, 희생양과 책임자가 필요했던 언론의 선택, 비난의 대상이 필요했던 여론의 선택.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는 지금부터의 국가대표팀을 맡게 될 새로운 감독에게 주어지는 것은 '기회'이지 '예정된 실패자의 낙인'이 아닙니다.
미지의 공포와 마주하고 있는 한국 축구계에도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의 월드컵이 아니라 더 나은 월드컵을 위해 용기있는 선택을 할 권리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희생양 삼고, 누군가에게 실패의 책임을 모두 전가한 뒤 또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눈 앞의 안위에만 머물지 않을 의무도 있습니다. 언론이나 팬들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자격이 없으면 당장의 월드컵에는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 또 다시 나갈 수 있다는 희망까지 절망으로 바뀌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진 = 대한축구협회 제공]
(SBS스포츠 이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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