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과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들, 1975~1987년 사이 형제복지원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오늘 리포트+에서 이 사건의 전말을 알아봤습니다.
■ "장난감이었지, 사람으로 생각 안 했다"…어린아이까지 납치해 감금한 '형제복지원'
형제복지원은 1975년 부산에 문을 연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부랑인 임시 보호소였습니다. 약 3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시설이었는데요. 일정한 거주지와 직업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선도'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부랑인들만 입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길거리에 머무는 무연고자뿐만 아니라, 장애인, 가족이 있는 일반인 심지어는 어린아이들까지 복지원으로 끌려왔습니다.
강제로 끌려온 이들에게 형제복지원의 생활은 끔찍했습니다. '부랑인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기술을 가르쳐 사회로 다시 내보낸다'는 취지와 달리, 복지원은 감옥과 다름없었습니다. 입소자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렸고 제식훈련과 강도 높은 노역이 온종일 이어졌습니다. 입소자들의 군기를 잡는다는 목적으로 폭행도 서슴없이 자행됐고, 남녀를 불문하고 성폭행을 당한 입소자들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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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에 들어간 사람 중에는 살아서 밖에 나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복지원에 두 차례 수용됐던 청각장애인 엄 모 씨의 가족들은 어느 날 갑자기 엄 씨를 주검으로 맞이해야 했습니다. 구타당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뚜렷했지만, 형제복지원에서 밝힌 엄 씨의 사망 사인은 '쇠약'이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형제복지원의 공식 사망자 수는 551명에 달합니다. 하지만 주검 일부가 암매장됐다거나 의과대학에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갔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어 사망한 피해자는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 500명 넘게 죽었는데도 징역 2년 6개월…형제복지원 뒤에는 누가 있었나?
형제복지원의 실태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것은 1987년이었습니다. 당시 한 검사가 복지원이 위치한 산 중턱 작업장에 감금된 수용자들을 목격하고 수사를 진행하던 중, 35명이 집단 탈출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겁니다. 입소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았던 복지원의 박 모 원장을 중심으로 수사가 진행됐고, 가까스로 복지원을 나온 피해자들은 박 원장에게 강력한 처벌이 내려지길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박 원장은 특수감금과 업무상횡령 혐의 등으로 구속됐지만, 7차례의 재판 끝에 일부 혐의만 인정돼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는 데 그쳤습니다. 1심 고등법원에서 박 원장은 특수감금 등의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대법원에서 이를 두 차례나 무죄로 판단해 파기 환송한 겁니다. 부랑자 선도라는 정부 훈령에 따른 정당한 행위라고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수사 과정에도 석연찮은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형제복지원 담당 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는 SBS 시사교양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수사 진행 중에 상부로부터 "박 원장을 구속하면 큰일 난다, 빨리 석방하라"는 "공소장을 변경하고 관련 공무원 이름을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다른 사건들과 달리 수사 내용이 청와대까지 보고됐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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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이 구속되면서 형제복지원 운영은 중단됐고 입소자들은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겨났습니다. 당시 겪었던 폭행 등으로 정신질환을 앓거나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사람도 많았습니다.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은 어떠한 배상과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형제복지원 수용 피해자들, 이번 진상조사를 통해 이 사건이 낱낱이 밝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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