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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악법을 거부하는 여성들…제작 과정 자체가 스릴러였던 영화 [스프]

[취향저격]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 (글 : 이화정 영화심리상담사)

신성한 나무의 씨앗
 

매일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와 나도 헷갈리는 내 취향, 뭘 골라야 할지 고민인 당신에게 권해드리는 '취향저격'.
 
 
  
2024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고 화제를 모았던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이란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개봉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신성한 무화과나무의 생존 방식에 대한 설명이 자막으로 나온다. 무화과나무의 씨앗은 새의 분비물을 통해 땅에 뿌려진 후,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자라나 주변의 다른 나무를 숙주 삼아 질식시키며 성장한다. 무화과나무의 씨앗은 긍정과 부정의 양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권정치제제로 국민들의 삶을 잠식해 숨통을 조인다는 부정적 의미와, 자유와 여성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변화의 씨앗이라는 긍정적 의미도 있다.

영화는 '이만'이 혁명재판소의 수사판사로 승진하면서 신에게 감사기도를 드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내인 '나즈메' 역시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비장한 표정으로 바뀐다. 수사판사라는 직위는 앞으로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기대도 주지만, 가족 일원이 매사에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는 경고를 뜻하기 때문이다.

상영시간이 3시간에 가깝지만 지루하지 않다. 스릴러 형식을 취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는 첫 번째 이유 말고도 몰입을 높이는 여러 요소가 있다. 모녀 세 여성과 아버지 캐릭터가 세밀하게 묘사된다. 카메라는 인물들을 주로 클로즈업 샷과 바스트 샷으로 잡고 있다. 영화의 초반에는 대사로 표현될 수 없는 심사가 그들의 표정을 통해 읽힌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표정이 아닌 행동과 대사를 통해 자신이 결정한 방향을 확실하게 제시한다. 특히 어머니인 나즈메의 표정은 여러 복잡한 심사를 대변해 준다. 나즈메는 이 영화에서 경계선에서 서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자녀들을 보호하고 싶은 나즈메의 욕망은 시종일관 같다. 남편이 승진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보인 첫 반응도 이제 성장한 두 딸이 각방을 쓸 수 있는 큰 집으로 이사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 나즈메는 처음에는 강하게 남편을 지지했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자녀의 편으로 이동한다.

자매인 레즈반과 사나는 처음부터 사리에 맞지 않는 강제력을 발휘하는 국가에 반발심을 보인다. 그들은 공영방송에서는 가려졌지만 그들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진실과 정의를 택한다. 반면에 나즈메는 딸들이 주장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가장인 남편을 지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쏜 산탄총에 맞아 얼굴 반쪽이 피투성이가 된 레즈반의 친구를 본 나즈메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만, 이내 원래의 단호했던 태도를 유지하고 딸의 다친 친구를 자신의 집에서 내보낸다. 하지만 가족보다 자신의 직업과 권위를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남편의 태도는 그녀의 등을 돌리게 한다. 아버지인 이만과 그가 호신용으로 받은 총은 국가와 가부장제 가장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래서 어느 날 느닷없이 사라진 총은 그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극한 폭력적 상황까지 치닫게 한다.

영화는 따뜻한 가족드라마로 보일 정도로 가족끼리 식사하는 장면들을 많이 삽입한다. 어떤 상황이 됐든지, 요리를 준비하고 가족을 위해 식탁을 꾸미는 순간만큼은 평화롭다. 어머니가 마련하는 식탁은 늘 아름답다. 나즈메는 둘째 딸인 사나에게 야채 다듬는 방법을 가르치고, 식재료가 팬에 던져지고 끓어오르는 모습이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음식이 조리되는 장면은 보는 사람에게 위안과 평온함을 준다. 하지만 아름답게 꾸며진 식탁 위에서도 결국 충돌이 일어난다. 아만은 수사판사가 사형선고 도장만 찍는 정권의 허수아비에 불과한 자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괴로워하지만, 자기 정당화를 선택하면서 대학생인 첫째 딸과 충돌한다.

라술로프 감독은 정치성이 강한 영화에 반전까지 넣어 흥미를 끌어올리는 연출력을 발휘한다. 영화에서 반전은 둘째 딸 사나다. 평상시에 아무 생각도 없고 철없어 보였던 사나는 그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대담한 행동을 한다. 심문을 받을 때나 아버지에게 추궁을 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분노하는 레즈반과는 달리, 사나의 얼굴에서는 공포나 반항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보낸 즐거운 시간이 담긴 동영상을 캠코더로 보는 사나의 얼굴은 순수해 보이기만 한다. 순수함은 가장 강력한 힘을 숨기고 있다. 사나를 얕잡아본 아버지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매우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다. 강력한 보호자였던 아버지의 몰락은 사나의 현실적인 몰락과도 연결될 가능성이 크지만, 사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의의 몰락에 비할 수는 없다. 영화의 엔딩 씬에서 아버지는 말 그대로 추락한다. 그리고 이만이 늘 끼고 있던 권위적인 반지가 흙먼지에 쌓인 채 뿌옇게 보인다. 총의 분실이 아버지로 상징되는 악법의 죽음을 예고했다면, 흙먼지로 더러워진 반지의 이미지는 법의 죽음을 선언한다.

이 영화는 촬영 과정이 스릴러 그 자체였다. 라술로프 감독은 실제 구속된 경험도 있고 국가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영화를 촬영해야 했다. 주인공인 수사판사 이만이 자신의 신분과 얼굴이 SNS에 노출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사람들을 경계하듯, 라술로프 감독 역시 언제라도 사복 경찰에게 체포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촬영 작업을 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그는 믿었고, 구속 직전에 독일로 망명해 편집 작업을 마친 후 칸 영화제까지 진출했다. 출연 배우들도 모두 체포될 위기를 무릅쓰고 완성된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영화의 무거운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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