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와인과 페어링>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와인 라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빠지지 않고 적혀 있는 숫자가 있다. "2010", "2016", "2021"처럼 4자리로 된 연도다. 우리는 그것을 '빈티지(vintage)'라고 부른다. 와인 초심자에게는 단순히 포도를 수확한 해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와인을 조금이라도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안다. 이 숫자가 때로는 와인의 품질과 개성, 나아가 가격까지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사실을.
왜일까? 와인은 결국 농산물이다. 땅에서 자라고, 비와 바람과 햇살을 받아 익는다. 포도 품질의 상당 부분은 날씨에 달려 있는데 기후는 해마다 달라진다. 그러니 같은 밭, 같은 품종, 같은 양조자가 만든 와인이라도 해마다 맛과 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해에는 따뜻한 봄과 긴 여름 덕분에 포도가 충분히 익고, 어떤 해에는 초가을의 비로 인해 수확이 지연되거나, 포도알이 희미하게 물러질 수도 있으니.

포도의 품질에 영향을 미치는 기후적 요소는 일조량, 온도, 강수량, 습도, 바람, 서리, 우박 등 다양하다. 포도는 이런 조건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라는데, 그 미묘한 기후 차이가 와인의 당도, 산도, 탄닌, 향, 구조, 밸런스에 빠짐없이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빈티지는 포도가 한 해를 어떻게 견뎠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와인은 그 이야기를 맛으로 들려주는 매개체다.
이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 와인 산지가 프랑스의 보르도와 부르고뉴다. 보르도의 2009년, 2010년, 2016년은 '위대한 빈티지'로 불린다. 포도가 적절하게 익고, 수확기에도 큰비가 오지 않아 와인이 균형 잡히고 숙성 잠재력도 풍부하다. 반면 2013년은 냉해와 잦은 강수로 인해 포도가 제대로 익지 못했고, 그 탓에 구조가 약하고 숙성 잠재력이 떨어진다. 와인 평론가들도 2013년 보르도를 평가할 때는 "장기 보관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곤 한다. 현시점에서 같은 샤토의 와인을 마시더라도 2010 빈티지는 여전히 단단하고 깊은 여운을 남기지만, 2013 빈티지는 이미 피크를 넘긴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부르고뉴에서는 이 빈티지 차이가 더욱 민감하게 드러난다. 보르도에서는 여러 포도 품종의 블렌딩 비율을 조절하여 기후의 영향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지만, 부르고뉴는 단일 품종(피노 누아 또는 샤르도네)을 사용하는 만큼 그해의 기후 조건이 와인의 맛과 향에서 한층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어떤 해에는 화사한 꽃 향이 피어나고 어떤 해에는 흙 내음이 지배적인데, 마치 같은 피아노곡을 다른 연주자가 치는 것처럼 해마다 와인의 뉘앙스는 달라진다.

빈티지 차이는 애호가의 구매 선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어떤 소비자는 지금 당장 마시기 좋은 와인을 찾는다. 이 경우에는 숙성 잠재력이 큰 해보다는, 비교적 일찍 맛과 향이 만개하는 평범한 빈티지를 선택하는 게 나을 수 있다. '위대한 빈티지'에 비해서 가격도 저렴하지 않은가. 반면 셀러에 넣어두고 10년, 20년 뒤를 기약하며 맛의 극치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장기 숙성 잠재력이 뛰어난 '위대한 빈티지'를 선택해야 한다. 와인 수집가들에게도 빈티지는 매우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같은 와인이라도 빈티지에 따라 경매 가격이 몇 배씩 차이 나기 때문이다. 일례로 샤토 무통 로칠드 2000 빈티지는 현재 수백만 원을 호가하지만, 1994 빈티지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친다.
기후 변화로 인해 해마다 와인 품질이 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빈티지의 와인을 블렌딩해서 일정한 맛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샴페인의 논 빈티지(non-vintage) 제품들이다. 샴페인 하우스들은 해마다 와인의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수년 치 와인을 섞는다. 그렇다고 샴페인 하우스들이 빈티지를 마냥 무시하는 건 아니다. 특정 연도에 기후 조건이 뛰어나고 포도의 품질이 탁월하다고 판단되면, 그해 수확한 포도만을 사용해 '빈티지 샴페인(vintage champagne)'을 별도로 생산한다. 해당 연도만의 개성을 담은 샴페인인데 논 빈티지 제품보다 숙성 잠재력도 크고 가격 역시 훨씬 높다.
진지한 와인 애호가들은 같은 와인을 빈티지 별로 준비해 비교 시음하기도 한다. 와인 동호회나 시음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수직 시음(vertical tasting)"인데, 같은 생산자의 같은 밭에서 나오는 와인을 여러 해에 걸쳐 맛보며 빈티지 차이를 체험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뮤지컬을 다양한 배우들의 연기로 감상하는 것과 같아서, 누군가는 2009 빈티지의 풍성함을 좋아하고, 또 다른 이는 2008의 절제된 우아함에 끌리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2024년 3월 6일 에노테카코리아 주최 행사에서 샤토 랭쉬 바쥬의 소유주인 장샤를 카즈(Jean-Charles Cazes)와 와인 시음 시간을 가졌던 일이 떠오른다. 그가 소유한 또 다른 와이너리인 샤토 오 바타이 2017, 2018 비교 시음이었다. 장샤를 카즈는 참가자들에게 떼루아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시음하라고 조언했다. 떼루아는 천지인(天地人), 그러니까 기후(天), 땅(地), 사람(人)처럼 와인을 만드는 데 영향을 끼치는 제반 요소를 일컫는 말이다. 어차피 땅도 같고, 만든 사람도 같으니, 2017년과 2018년의 기후 차이가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빈티지별로 블렌딩 비율이 달라서 2017은 카베르네 소비뇽 66%에 메를로 34%이며, 2018은 카베르네 소비뇽 59%에 메를로 41%이다. 평론가들은 대체로 2018 빈티지를 더 높게 평가했는데, 두 와인의 향과 맛을 비교해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2017에 비해 2018의 향이 더 강하고 화사하며 묵직하다. '2017년보다 2018년 날씨가 더 좋았구나.' 그래도 1년 선배라고 2017 빈티지가 조금 더 숙성되어 마시기 편한 느낌이었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2018 빈티지를 잡을 정도로 기량 차이가 컸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