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국립 중앙 박물관이 독립 운동가의 붓글씨라고 전시했던 작품이 친일파의 글씨였다는 의혹에 휩싸였습니다. 박물관은 검증 절차가 미흡했다면서 필적을 감정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안희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한 폭의 붓글씨 앞, 무릎을 꿇고 흐느끼는 백발의 남성.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촬영된 이 사진 한 장이 최근 화제가 됐습니다.
붓글씨의 주인으로 소개된 건 독립운동가 박원근 지사, 눈물을 흘리는 노인은 그 아들 박용현 씨입니다.
유품 하나 없이 그리워만 하던 아버지의 흔적을 처음으로 만난 줄 알았던 겁니다.
[박용현/박원근 애국지사의 아들 (지난 2020년 8월) :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라고 해서, 저희 아버지가 거기 나와 있어요. (그 외에는) 간헐적인 아버지의 생각(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이고….]
하지만 사흘 뒤 박물관은 별다른 공지 없이 붓글씨를 치웠고, 대신 그 자리에는 시 한 편이 내걸렸습니다.
[전시회 관계자 (어제 오후) : 교체가 된 상태입니다. 개인 사정으로 인해서….]
슬그머니 작품을 내린 지 이틀 만인 어제 SBS의 취재가 시작되자 국립중앙박물관은 공식 사과문을 내놨고, 오늘은 유홍준 관장이 직접 고개를 숙였습니다.
"동명이인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어 확인을 위해 철수했다"는 건데, 황당하게도 그 동명이인은 대표적인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이었습니다.
일본제국의회 일원이자 3·1 운동 진압에 앞장선 것으로 알려진 박중양, 개명 전 이름이 박 지사와 같은 박원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물관 측은 "유물 소유자가 박 지사의 작품이라고 말했다"며 "전시 후에 제보를 받은 뒤 필적을 비교, 감정하고 있다", "검증 절차상 미흡했던 부분은 인정한다"고 밝혔습니다.
박 지사 후손은 거꾸로 독립운동가를 괴롭혔던 친일파의 글씨일 수 있다는 소식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그렇다고 국가 기관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일에 앞장서는 것은 애국지사 후손으로서 옳지 않다며 "진위 파악에 힘써 달라고"만 밝혔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뒤늦게 재발방지책 마련에 나섰지만, 유물 부실 검증으로 체면을 구겼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영상취재 : 정상보·이찬수, 영상편집 : 최혜란, 디자인 : 한흥수·이소정·김한길·전유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