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후손이라고 이리저리 불려 다니긴 하는데 정작 유공자 후손으로는 등록할 수 없다니 참 딱한 노릇이네요. 3대에 걸쳐 꼬박꼬박 제사도 드리는데…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을사늑약 이후 홍주성 전투에서 활약하다 전사한 의병장 채광묵(1850∼1906) 선생의 후손 채수일(64·충남 청양군 비봉면)씨는 6일 '평강 채씨' 족보와 각종 자료들을 펴놓고 길게 한숨을 지었다.
텃밭에 무씨를 뿌리다가 급히 방에 들어와 이런 저런 문서를 펼친 채씨는 채광묵 의병장의 증손이다.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선정한 '8월의 독립운동가'였던 채광묵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안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키고, 이듬해 5월 민종식 등이 다시 일으킨 의병에 참여해 홍주성을 점령했으나 2개 중대 규모 이상의 일본군 공격을 받아 순국했다.
병든 몸이던 아버지를 따랐던 아들 채규대도 전사, 부자는 한날 한시에 숨졌다.
아들의 나이 겨우 16살이었다.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해 1년 뒤인 1906년 의관(衣冠)을 놓고 장사를 지냈다.
대가 끊기자 문중 어른들과 의병으로 뛰어들었던 동지들은 항렬 상 채광묵의 조카가 되는 세 살짜리 채규현을 당시 서산군 운산면에서 데려와 '사후 양자(死後 養子)'로 입적시켜 상복을 입히고 곡을 하게 했다.
채수일 씨는 "그렇게 증조부 장사를 치르고 3대째 제사를 지내 오지만 조부(채규현)의 호적이 어찌 된 일인지 생부(生父) 채정묵 아래에 올라 의병장(채광묵)과는 관계가 없는 인물이 됐다"며 "호적도 정리하고, 의병장 계보를 잇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아봤지만 허사였다"고 안타까워했다.
지난 1993년 양친자관계존재확인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에서 각하됐다는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 항일 의병장 아들로 일제의 민적에 올려지는 걸 꺼려 생부 밑으로 들어갔고, 선친까지 주위에서 '유족연금 받으려 한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한두 차례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냥 넘긴 탓"이라고 말했다.
또 "한때 면장이 '독립운동 자료가 있으면 다 태우라'고 해 마당에 놓고 태웠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1990년 1월 민법이 개정돼 사후 양자에 관한 법률 규정이 폐지됐다.
정부도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등록해 연금을 타내려고 사실을 왜곡해 신청하는 사례가 잇따르자 그해 12월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에서 이전 독립운동가 유족으로 등록된 경우를 제외하곤 사후 양자는 유공자 유족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법령을 개정해 채씨 일가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증조부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돼 채수일 씨 내외가 윤주경 독립기념관 관장 초청 오찬에 초대되면서 '후손이면서도 후손이 아니어야 하는'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게 됐다.
채씨 조부가 의병장의 양자로 입적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안병찬 선생의 손자 안선영(100·청양군 청양읍)씨는 "내 조부가 양자입적을 도왔다. 3대째 정성껏 의병장 제사를 받들고 있는데 여태 유공자가 안 됐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주계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예연구사도 "채광묵 등의 활약은 독립신문이나 황성신문에서도 확인된다. 의병들이 순국할 경우 양자 입적은 당시 당연한 관례이자 의무였다. 국가유공자 심사 때 법률적 검토도 중요하지만 시대적 상황과 후손들의 노력도 충분히 고려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