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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걷기 좋은 동네, 걸으니 좋은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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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는 드물게 한 동네에서 30년을 살았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초중고교를 다녔기 때문에, 어릴 적 나의 세상은 딱 우리 동네까지였다. 한 쪽은 나의 모교들을 둘러싼 높은 방음벽 때문에 인적이 드문 길이 나있었고, 다른 세 방향은 넓은 도로와 하천으로 막혀 있었다.

버스나 지하철, 차량 없이는 동네를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2000년대 들어서 우리 동네는 확 달라졌다. 방음벽 때문에 어둡고 황량했던 도로의 조명을 밝혔더니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진짜 ‘길’이 됐고, 옆 동네와 이어졌다.

여전히 3면이 도로지만, 복개천에 운동장과 잘 닦은 산책로가 생겨서 한 쪽 세상이 또 열렸다. 옆 동네, 옆 옆 마을로 걸어갈 수 있게 되면서, 동네는 넓어졌고 풍성해졌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은 모두 동네니까.

서울대 건축학과 박소현 교수는 ‘걷기 좋은 동네’, ‘많이 걷게 되는 동네’란 무엇인지 GPS 같은 장비를 통해 축적한 데이터를 토대로 체계적·실증적으로 연구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궁금해했던 것들, 즉 걷기 좋은 동네에 산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실제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달라지게 하는지 속 시원히 풀어냈다.

먼저 지난해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조비룡 교수팀과 작업한 결과물부터 살펴보자. 공대 건축학과와 의대가 합작해 내놓은 논문은 동네 골목길의 기울기에 따라 사람들의 걷는 양이 크게 달라지고, 장기적으로는 만성질환 위험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동네의 경사가 심한(평균 경사 각도 8도 이상) 서울 도심의 한 동네와 평지에 자리잡은 서울 외곽의 한 신도시를 비교해보았다. 두 지역에 사는 30~40대 주부에게 GPS를 장착해 1주일 동안 걷는 양을 측정했더니, 평평한 지역에 사는 주부들이 60%나 더 많이 걸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서울대병원 연구팀이 이 두 지역에서 2년 이상 거주한 주민 1만 6천 명의 건강상태를 조사해 봤더니, 평지에 산 사람들이 경사가 심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보다 복부 비만 위험도 약 17%, 고혈압 위험도 12%, 당뇨병 위험도는 14%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동네에 공원이나 보건소, 병원이 몇 개 있는지 못지않게, 동네 골목길 환경도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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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수가 최근 펴낸 책 <동네 걷기 동네 계획>(박소현·최이명·서한림 지음, 공간서가)에는 서울과 미국 시애틀의 보행환경을 비교한 흥미로운 통계가 나온다.

서울 북촌과 상계 지역 주부들의 하루 평균 보행량이 대략 2.69km(39분)인데, 시애틀에 사는 한국계 이민 주부들의 하루 평균 보행량은 대략 400m(6분)로, 7배 정도 차이가 나더라는 것이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줄 때, 서울의 경우 주부의 86%가 함께 걸어서 가는데, 시애틀의 경우 21%만이 아이와 걸어서 가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렇게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것에서부터, 반찬거리 같은 소소한 물건을 사러 갈 때에도 걸어갈 수 있는 환경과 그렇지 않은 환경이 ‘걷기’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동네는 잠깐 머무는 곳이 아니라, “진부하지만 중요한 일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어떤 동네에 사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박교수는 걷기 기반의 동네 계획을 세울 때 핵심은 ‘걸어서 많은 것을 편하게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니 많이 걷게 되어 좋은 동네’라고 말한다. 한 때 최고의 가치였던 효율적인 최단거리 동선은 걷기 좋은 동네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고, 평지 혹은 신도시라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예컨대 북촌 같은 오래된 동네는 경사가 심한 골목이 굽이굽이 이어져있지만, 주변에 걸어서 갈 수 있는 학교와 상점이 있고, 최근 관광 명소로 유명세를 탈 정도로 볼거리가 많고 걷기 좋은 환경이다. 즉 경사가 심한 길이라도 더 걷고 싶게 꾸미고 정비하면 동네 환경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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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공간서가/사진촬영 - 오종은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걷기 좋은 동네, 걸으니 좋은 동네의 중요성을 공감하는 것이다. 집은 재산을 증식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고, 부동산의 가치만으로 내가 살 동네를 고른다면, 생활 형편이나 수입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어울려 배타적으로 살고자 한다면, 걷기 좋은 동네를 만들자는 것은 의미 없는 구호일 뿐이다.

지역사회 회복 같은 거창한 목표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걷다 보면 건강해지고, 동네가 보이고 이웃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씩 알게 되고 보다 보면 애착이 생긴다. 좋아하는 동네에서 더 많이 걷게 되는 선순환을 기대하는 것은 과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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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현 기자 기자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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