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이 들썩이고 있다. 특히 이번 대선은 민주, 공화 양당 모두 당내 경선이 그 어느 때 못지 않게 뜨겁다.
여당인 민주당에서는 대세론을 앞세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이를 위협하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대결이 관전 포인트다. 반면 공화당에서는 기업인 출신인 도널드 트럼프가 당내 주류들의 격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지율 선두를 달리며 공화당을 뒤흔들고 있다.
아직 당내 경선 중이라 본격적인 여야 대결 구도가 짜인 건 아니지만 몇 가지 정책을 놓고는 벌써부터 여야간 날 선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정책 중 하나가 바로 이민 정책이다. 논란에 불을 붙인 건 미국-멕시코 국경에 벽을 쌓아 불법 이민자들을 막겠다고 공약한 트럼프다.
이민자 비하 발언과 얽히면서 트럼프 개인의 단순한 막말 논란처럼 보도되고 있지만 이민 정책은 미국인 스스로도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안이다. 미국에 있어 이민 정책은 정체성과 직결돼 있다. 그런 미국에서 트럼프의 기이한 주장이 일정 부분이나마 먹히고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 정체성 ① – Melting Pot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은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영국을 떠난 청교도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다. 이후 경제적, 정치적 혹은 종교적인 이유 등으로 유럽을 비롯한 각국에서 이민자들이 유입돼 독특한 정치, 사회 제도와 문화를 꽃피웠다. 흔히 모든 인종과 문화가 한 데 뒤섞이는 곳이라는 의미로 미국을 ‘Melting Pot’, 즉 용광로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의 핵심 가치로 꼽히는 ‘Hybridity’, 융합성은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든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과거 공산권을 무너뜨린 1등 공신이자 미국 문화 권력의 핵심인 ‘할리우드’가 대표적인 예다. 막대한 자본력과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결합해 상품화한 할리우드는 군사력 못지 않게 슈퍼 파워 미국을 뒷받침하는 핵심 요소다.
미국의 정체성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는 쪽이 현 집권 여당인 민주당이다. 민주당의 정책 공약(platform) (http://www.democrats.org/party-platform)을 보면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불법 이민자들에게까지 소정의 절차를 밟으면 시민권 취득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열린 미국’인 셈이다.
우리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우리 경제 발전에 기여한 이민자 세대들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미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의 번영은 우리의 가치와 필요를 충족시키는 이민 시스템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오늘 날 우리의 이민 시스템이 크게 훼손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가족들을 흩어져 살게하고, 정직한 고용주들과 근로자들을 잠식하고, 법 집행 부담을 늘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음지에서 일하며 살도록 하고 있다.The story of the United States would not be possible without the generations of immigrants who have strengthened our country and contributed to our economy. Our prosperity depends on an immigration system that reflects our values and meets America's needs. But Americans know that today, our immigration system is badly broken—separating families, undermining honest employers and workers, burdening law enforcement, and leaving millions of people working and living in the shadows.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런 이민 시스템을 고쳐 미국경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있음을 알고 있다. 또한
이 나라가 불법 이민자들을 음지에서 불러내 법을 지키고 영어를 배우고 세금을 내서 시민권을 취득하도록 하는 포괄적인 이민 개혁을 긴급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Democrats know there is broad consensus to repair that system and strengthen our economy, and that the country urgently needs comprehensive immigration reform that brings undocumented immigrants out of the shadows and requires them to get right with the law, learn English, and pay taxes in order to get on a path to earn citizenship.
● 정체성 ② – Majority of White
미국이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 정체성이 무엇인지, 또 그 정체성 형성이 아직까지 ‘진행형’인지는 확답하기 어렵다. 미국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기 때문이다.
다만, 공시적(共時的) 측면에서 보자면 미국의 정체성은 ‘백인’, ‘기독교’, ‘서양문화’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미국 유권자의 75% 가량이 백인인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공화당의 노선은 이런 정체성 인식과 맥을 같이 한다.
현재의 미국과 미국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만큼 지지층 가운데 상당수가 이민자들, 특히 불법 이민자들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일자리를 놓고 값싼 임금의 불법 이민자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저숙련 백인 근로자들이 대표적인 계층이다. 그들의 불만이 바로 트럼프의 인기 비결이다.
하지만 공화당 자체가 이민자 유입에 반대하는 건 절대 아니다. 군복무에 임하고 있는- 아직은 시민권자가 아닌- 이민자들에게는 ‘감사하다’(grateful)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공화당은 미국 정부가 이민 자격을 결정할 때 신청자가 미국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갖춘 사람인지를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http://www.republicanviews.org/republican-views-on-immigration/). 이민자들을 받되 미국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선별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 국민과 국익이 최우선이라는 이념이 기저에 깔려 있다. 한마디로 ‘닫힌 미국’인 셈이다. ( https://www.gop.com/platform/)
미국 경제의 가장 큰 자산은 미국 근로자다. 과거 이주 노동자들이 우리 나라 건설을 도왔던 것처럼 오늘날 합법적 이민자들은 미국 곳곳에서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다. 이민자들의 근면성과 미국적 가치들에 대한 헌신은 우리 경제를 강화하고 문화를 풍요롭게 하며 우리가 다른 나라들을 보다 잘 이해하고 세계무대에서 효율적으로 경쟁할 수 있게 해준다. 불법 이민은 이런 좋은 점들을 훼손하고 미국 근로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The greatest asset of the American economy is the American worker. Just as immigrant labor helped build our country in the past, today’s legal immigrants are making vital contributions in every aspect of our national life. Their industry and commitment to American values strengthens our economy, enriches our culture, and enables us to better understand and more effectively compete with the rest of the world. Illegal immigration undermines those benefits and affects U.S. workers
……(중략)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필요로 할 때, 그 일자리를 불법 이민 근로자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When Americans need jobs, it is absolutely essential that we protect them from illegal labor in the workplace.
● ‘열린 미국’ vs. ‘닫힌 미국’
합법은 물론 불법 이민자들까지도 소정의 절차를 밟으면 나라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보는 확장적 이민 정책을 추구하는 민주당과, 현재 미국민의 이익을 바탕으로 이민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는 공화당의 시각 차는 미국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정체성을 대변한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가장 강력한 반 이민법을 시행한 미국 애리조나 주의 사례가 그 방증이다.
다만 미국 대선의 최대 쟁점 가운데 하나인 이민 정책이 단순한 정책이 아닌 미국의 정체성이라는 근본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미 대선을 바라본다면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분명히 해둘 점은 ‘열린 미국’, ‘닫힌 미국’이라는 용어다. 어감상 전자가 긍정적인 반면 후자는 부정적이다. ‘확장적’, ‘보수적’이라는 단어도 생각해봤으나 어감이 비슷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앞서 사용한 이런 용어들은 모두 가치 중립적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