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의 84세 아버지는 6년 전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고도 자꾸 차를 몰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운전할 때마다 크고 작은 사고를 냈다.
가족과 의사가 '본인과 다른 사람의 안전을 위해 운전을 그만두라'고 했지만 오히려 역정만 냈다.
아버지는 집에 가겠다며 광주에서 예전 집이었던 수원까지 운전하다 길을 잃기도 했다.(2014년 치매상담전화센터 상담사례) A씨의 아버지가 만약 큰 사고를 내 사고 상대방에게 배상해야 한다면, 이는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A씨 가족이 져야 할까.
아니면 가족 대신 우리 사회 모두가 감내할 비용일까.
고령화 국가 일본에선 치매노인의 행동을 그 가족에까지 책임지게 할 수 있을지를 판단한 첫 판례가 나왔다.
일본을 뒤따라 늙어가는 한국에선 아직 유사 소송 사례가 없다.
당장 사고가 일어나도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법조계에선 빠르게 느는 치매 인구와 가족을 고려해 관련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 "가족은 책임이 없다" vs.
"책임 부인 어려워" 이달 1일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철도회사가 집을 나와 배회하다 전차에 치여 숨진 91세 치매환자의 아내와 장남에게 "운송지연 피해 등 720만엔을 배상하라"며 낸 소송에서 1·2심을 뒤집고 가족에게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최고재판소는 치매환자처럼 책임질 능력이 없는 사람의 '감독의무자'가 치매환자의 행위를 배상토록 한 일본 민법 714조가 아내와 장남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아내와 장남에게 숨진 치매환자의 감독의무가 없다는 의미다.
재판소는 가족의 감독의무를 따질 때 ▲ 가족과 치매환자의 상태 ▲ 동거 여부 ▲ 재산관리 주체 ▲ 치매환자의 문제행동 전력 ▲ 간병실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에 치매환자의 장남은 20년간 별거했다는 이유로, 부인은 스스로도 요양 대상이란 이유로 감독의무·배상책임이 없다는 판단을 받았다.
감독의무를 규정한 일본 민법 714조는 한국 민법 755조와 유사하다.
민법 755조는 '미성년자나 심신상실자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혔으면 그를 감독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배상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국내에서 같은 소송이 제기될 경우 이 법을 치매환자와 가족에 적용할 수 있을지가 쟁점이 될 걸로 법조계에선 본다.
한 판사는 "치매노인을 가족이 부양해야 한다는 법적 근거가 따로 있지 않는 한, 배우자나 자녀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문제 전력이 있는 치매환자라면 동거 가족에게 감독의무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 자칫 260만 치매가족 파탄 가능성…입법·제도 시급 이번 일본 최고재판소 판례가 시사점이 큰 이유는 한국의 치매 인구가 일본처럼 급증세이기 때문이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치매환자는 12분당 1명씩 늘어나 64만8천여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노인인구 10명 중 1명꼴이다.
2010년의 47만4천여명에서 5년 사이 17만여명이 늘었다.
환자를 간호하는 가족 역시 배우자, 자녀, 손자를 포함해 260만명이나 된다.
이들에게 거동 가능한 치매환자는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
초기치매 증상을 보이는 고모와 함께 사는 이모(28)씨는 "회사에 간 동안 고모가 집을 나갔다가 사고라도 당할까 봐 걱정이 크다"고 했다.
대부분의 치매환자 가족이 환자와 24시간 함께 있지 못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가족에게 감독의무를 지우기는 쉽지 않다.
한 판사는 "함께 늙어가는 배우자나 따로 사는 자녀가 치매노인을 신생아 돌보듯 감독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가족의 책임을 부인한다면 '피해는 있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모순에 빠진다.
한 가족의 치매환자가 발생시킨 비용을 사회 전체가 나눠 부담하는 것이다.
가족의 감독의무를 인정하면 치매환자에 대한 관리·보호가 한층 강화될 수 있다.
하지만 가족이 치매환자 부양을 꺼릴 공산이 크다.
일본에서도 1·2심이 가족 배상책임을 인정하자 치매환자 보호자 단체가 "판결이 확정되면 어느 아들·딸이 치매부모를 모시려 하겠느냐"며 크게 반발했다.
사실상 가족 공동체의 파탄이다.
법조계는 일본에서 첫 판단 사례가 나온 만큼 국내에서도 유사 소송이 제기되는 건 시간문제라 본다.
이에 일본의 사례를 참고해 치매환자의 법적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논의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변호사는 "치매노인의 불법행동에 책임을 가리는 입법론을 미리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판사는 "가족과 사회의 책임 구분선을 일률적으로 그을 수 없는만큼 치매노인에 대한 부담을 사회와 가족이 나눠 맡을 준비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