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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베이징에서 만난 단재 신채호 선생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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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 위대한 독립 운동가를 꼽을 때 첫 번째로 꼽히는 인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민족사의 무대를 한반도가 아닌 대륙중심으로 확장시킨 역사학자로 식민치하의 대중들을 일깨운 언론인이자 신민회와 광복회 등 항일 투쟁 비밀결사단체를 이끌며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순국열사입니다.

그러나 너무 위대해서일까요?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이자, 문필가, 사상가, 언론인이면서 독립운동가라는 한 사람이 한 일이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다양한 업적을 남겨서인지 신채호에 대해 정작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당시 신채호는 이승만이 주창한 외교론(외교를 통해 독립을 이끌어야 한다는 논리)을 강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이승만 정권 때는 단재를 조명하는 일이 중단된 시기가 있었고, 무정부주의나 아나키즘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오랜 기간 단재의 업적이 오해받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단재는 성품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무서울 만큼 냉정하면서도 동시에 열정적인 사람이었으니까요. 물론 그의 행동과 말은 모두 조국의 독립으로 귀결됩니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그에 관한 에피소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일제에 굽히지 싫어 평생 고개를 숙이지 않고 세수를 했다는 것인데, 더한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여념이 없던 신채호는 일제에 잡힐 위험을 무릅쓰고 1917년 한국에 몰래 들어옵니다. 이유는 바로 조카딸의 결혼문제 때문입니다. 단재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형이 일찍 돌아가시자 형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 향란을 친딸처럼 사랑했는데, 중국으로 데려갈 수 없게 되자 조카딸을 동지인 임치정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동지였던 임치정이 조카딸을 친일파와 결혼시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격분해서 국내에 온 겁니다. 이미 결혼을 결심한 조카딸이 결혼을 강행하겠다고 하자, 분노한 신채호는 “이제부터 너는 나의 조카딸이 아니고, 나는 너의 삼촌이 아니다. 골육이라도 이렇게 끊어버린다”라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다고 합니다.

3.1 절을 앞두고 관련한 기획취재를 하면서 숨겨진 신채호의 자취를 자세히 취재해보고 싶었습니다.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이 반일(反日)세력이 많아서 항일운동하기에 좋은 조건을 가진 상하이에서 활동할 때, 친일(親日)세력이 판을 쳐서 용감하다는 독립 운동가들도 피했던 위험한 베이징에서 무려 15년 간이나 항일 투쟁을 벌인 사실이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나라도 없고, 돈도 없는 상황에서 이미 유력한 언론인으로 일제가 잡으려고 혈안이 됐던 독립운동가 신채호가 어떻게 중국의 심장부인 베이징에서 그토록 오랜 동안 항일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는 베이징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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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청년단' 본부가 있었던 베이징 후통 (사진=연합뉴스)

신채호를 만나기 전에, 베이징만이 지닌 독특한 주거지역인 ‘후퉁’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후퉁’은 좁을 골목이라는 뜻으로, 아주 좁은 길을 중심으로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있는 곳입니다. 아주 쉽게는 한국의 극빈층 주거지역인 달동네를 연상하면 되지만, 베이징의 ‘후퉁’은 언덕이나 고지대가 아닌 도심 한가운데 거미줄처럼 형성되어 있습니다. 1949년 기준으로 베이징의 후퉁이 6천 개가 넘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예전의 베이징은  ‘후퉁’이 주거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상전벽해처럼 변하고 있는 베이징에선 오래된 삶의 정취를 품고 있는 ‘후퉁’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가난했던 신채호는 극빈층이 사는 ‘후퉁’에 거주했던 터라, 신채호의 항일운동 자취가 숨 쉬고 있는 후퉁이 베이징의 개발붐과 함께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채호 선생이 살았던 후퉁 가운데 다행히 현재 남아있는 곳이 있습니다. 한 곳은 선생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 에 머물렀던 ‘챠오떠우 후퉁’이고, 또 다른 한곳은 베이징에서 가장 힘겨운 시기를 보낼때 살았던 ‘따허이후 후통’입니다.

‘챠오떠우 후퉁’은 요즘 서울의 북촌같은 분위기로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난뤄구샹 거리>와 이어져 있습니다. 인파로 북적이는 <난뤄구샹 거리>에서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면 고즈넉한 집들이 이어진 ‘챠오떠우 후퉁’이 나옵니다. 이곳은 다행히 보존지구로 지정되어서 100년 전 신채호가 거닐던 길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여성독립운동가 박자혜 여사와 신접살림을 차린 곳으로 신채호 부부가 사랑했던 아들을 낳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절은 신채호의 인생을 통틀어 딱 1년 남짓이었습니다. 극심한 생활고와 언제 일제에 잡힐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 탓에 신채호는 가족들을 환국시킨 뒤 베이징에서 가장 극빈층이 많이 사는 ‘따허이후 후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현재 이곳 또한 형편이 매우 어려운 사람들이 사는 열악한 주거지입니다. 지금도 그런데 100년 전에는 오죽했을까요. 신채호는 이곳에서 춥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연명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은 그 어떤 시기보다 화려했습니다.

당시 중국 최고의 언론사인 <북경일보>와 <중화보> 등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글을 기고해 큰 반향을 일으켰고, 루쉰 저우쭤런 등 당대 중국 최고의 지성들과 교류하며 중국 집권층에게 한국의 독립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고자 동분서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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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감옥 단재 신채호선생 수감 독방 (사진=연합뉴스)

이렇게 일평생 오직 독립운동에만 매진했던 신채호는 지금으로부터 꼭 80년 전인 1936년 영하 20도의 강추위가 엄습한 뤼순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가난으로 평생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쇠약해진 몸이 7년 간의 모진 옥살로 악화 된 겁니다. 

감옥측에서는 죽기 직전의 신채호에게 병보석을 허가하지만, 신채호는 거부합니다. 병보석으로 나가려면 보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친지와 동료들이 어렵게 구한 보증인이 친일파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재력이 있는 사람은 친일파 밖에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신채호는 친일파에게 자신의 목숨을 의지할 수 없다며 죽음을 택합니다. 결국 임종을 지킬 가족도 없이 차디찬 감옥에서 홀로 57세의 생을 마감합니다.

3.1 만세 운동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독립운동으로 세계사에 기록될 만큼 위대한 항거운동입니다. 그런 자랑스런 역사를 만들고, 도무지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독립의 꿈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단재 신채호 같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자주 독립국가 국민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 덕분인지...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로운 오늘이, 그분들에게는 얼마나 단 하루라고 살고 싶었던 ‘독립 대한민국’에서의 하루였는지, 1년에 단 하루라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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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안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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