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레' 라는 풍습이 우리 겨레에게 있다. 들에서 농삿일하다 새참을 먹을 때, 들로 산으로 놀이 가서 음식을 들기 전에 조금 덜어 '고수레'하고 주변에 던지는 일종의 민속 신앙 행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체하거나 탈이 난다고 믿었다.
기원에 대해선 이런저런 설이 있다. 굶주려 죽은 고 씨 성의 할머니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거나, 비범한 도인(道人)의 어머니 고 씨 무덤을 돌봐준 농부가 흉년을 모면하게 되자 다른 농부들도 들에서 음식 먹을 때 첫 술을 고 씨 넋에게 바치게 됐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조상 숭배와 농경문화에 바탕 한 풍속으로 후손의 번성과 영화, 풍요로운 농사를 바라는 농민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아시아에 뿌리를 둔 남미 페루 선주민에게도 비슷한 민속이 남아있다. 술을 포함해서 음식을 입에 가져가기 전에 으레 대지에 뿌리면서 "대지여, 어머님이시여! 우리에게 훌륭한 열매를 거두게 해 주십시오.."라고 축원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월 대보름엔 까치 까마귀에게 밥을 주는 풍속도 있다. 찰밥과 나물, 약식을 지어 먹고 지붕이나 담장, 나무에 올려두어 까막까치가 먹게 한다. 풍속의 유래는 삼국유사의 '사금갑조(射琴匣條; 거문고집을 쏘다 이야기')에서 찾는다. 신라 21대 소지왕이 천천정(天泉亭)이라는 곳에 행차할 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 왕이 죽을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기에 공덕을 기려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제사지내게 됐다는 것이다.
왕을 구한 보답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새들이 농사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또는 새의 배설물이 농사에 비료가 되는 만큼 농사가 잘 되기를 비는 마음, 먹을 것이 없는 짐승에게 대보름날만이라도 나눠 먹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다(한국 민속대백과사전, 국립민속박물관).
인간이 자연의 덕을 보는 만큼 자연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자연과 어울려 살아감을 당연하게 여겼기에 이런 민속이 생겨났을 것이다. 사과 감을 다 따지 않고 가지 끝에 몇 개 남겨 한겨울 까치밥으로 남겨주는 데서도 자연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드러난다.
'고수레'와 '까치밥' 민속의 정신은 추수 마친 들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늦가을부터 겨울을 지나 초봄까지 5,6개월 동안 우리나라 논은 북쪽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기러기, 오리와 같은 겨울철새의 안식처가 된다.
국제적인 멸종위기종인 두루미, 재두루미, 흑두루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농민이 추수할 때 떨어진 벼 이삭이나 탈곡한 뒤 잘게 썰어 논바닥에 깔아놓은 볏짚 덕분이다. 볏짚에서 채 떨려나지 않은 낟알도 철새에겐 소중한 월동 양식이다. 덕분에 겨울에도 들녘은 황량하지 않고 생명의 날갯짓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이룬다.
이런 모습을 갈수록 보기 어렵다는 게 아쉽다. 전국의 농촌 어디서나 볏짚을 둥그렇게 꽉꽉 말아 비닐 포장재로 칭칭 감아 놓은 뭉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젖소나 고깃소를 키우는 축산농가에 사료로 팔기 위해서다. 논 1평(3.3㎡)에서 말아 들이는 볏짚 값으로 120원~130원을 받는다.
힘들게 농사지어도 생산비도 제대로 건지기 어려운 마당이니 뭐든 돈이 되는 건 팔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농민들은 말한다. 조류 연구가와 생태 환경 운동가들은 이대로 가다간 겨울 철새들이 빠르게 줄어들어 생물다양성과 생태계에 더 큰 문제가 벌어지게 된다고 걱정한다.
추수 뒤 들판에 떨어진 낟알이 수확 방식에 따라 차이가 확연히 남을 입증한 논문이 있어 흥미롭다. 볏짚을 거둬간 논에서는 가로 세로 20cm의 면적에서 평균 28개인 데 비해 볏짚을 그대로 둔 논에서는 75개로 2.7배나 많았다.
대형 기계로 추수한 논에서는 낙곡이 평균 37개인데 반해 소형 기계로 구석구석 ‘알뜰하게’ 훑은 논에서는 11개로 대형 기계를 쓸 때에 비해 30%밖에 안 됐다. 낙곡이 줄어드는 만큼 들판에 날아오는 조류의 수와 종류도 줄었다. 서식지의 환경이 생물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여지, 이른바 ‘부양능력’이 사그라들기 때문이다.
대규모 간척 농지인 충남 서산 천수만에서 대형 영농 법인과 소규모 개별 영농의 경우를 비교해서 산출한 결과다(유승화, 천수만에서 월동하는 조류군집과 먹이자원과의 관계, 한국환경생태학회지 제22권, 2008년). 겨울철새 특히 국제사회가 보호해야 할 멸종위기 조류인 두루미를 위해서는 농경지 낙곡이 필수임을 알 수 있다.
환경부도 이런 사실을 중시해서 2002년부터 ‘생물다양성 관리계약 제도’를 도입했다. 철새 모이가 되도록 볏짚을 남겨두거나(볏짚존치) 벼를 재배하지 않고 두면(벼 미수확) 보상해준다. 보리를 심어 철새가 먹도록 해줄 때(경작관리)도 마찬가지다. 겨울철 논에 물을 대서 철새 쉼터를 마련해주는 것도 지원대상이다.
2016년도에 전국 24개 시군에 환경부가 지원한 예산은 13억9백만 원이다. 강원도 철원군에는 볏짚 남겨두기 사업으로 6천만 원이 배정됐다. 시 군에 국가가 지원하는 예산 비율은 30%이니 철원군이 이번 겨울에 철새 보호를 위해 쓴 예산은 지방비 70%, 1억4천만 원(도비 2천8백만 원+군비 1억1천2백만 원)을 더해 모두 2억 원이다.
지난해 2억 3천만 원에 비해 15%, 3천만 원이 줄었다. 필요 예산의 1/4에 불과해 볏짚을 밖으로 내가는 걸 막을 수 없다고 농민도 담당 공무원도 한숨을 쉰다. 논에 볏짚을 남겨둘 때 보상액은 3.3㎡에 99원으로 1ha(100m×100m, 1만㎡)당 30만원인 데 비해 사료용으로 팔 때는 같은 3.3㎡당 120~130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산이 모자라니 철원군은 볏짚 남겨두기 보상을 농가별로 4년에 한번으로 제한하고, 그나마도 선착순으로 신청하도록 하는 실정이다. 환경부(생물다양성과)도 ‘철새와 농민을 위한 사업이지만 전체 예산 제약으로 지자체, 농민이 원하는 만큼 지원하지 못해 아쉽다’고 토로한다. 정부 예산 당국 책임자들이 생태 감수성을 높여야 할 부분이다.
겨울 철새 쉼터에서 또 다른 문제는 함부로 뿌려대는 돼지분뇨 피해다. 축산농가 폐기물로 나오는 분뇨를 2012년부터 바다에 버리지 못하게 되자 정부는 ‘발효 액비’라면서 논밭에 뿌리도록 정책을 바꿨다.
들판 곳곳에 대형 원통 모양의 저장탱크를 두고 전기를 끌어다 휘저으며 발효시켜 액비로 만든다는데 효과에 대한 논란이 높다. 충분히 삭히지 않아 악취를 풍기는 건 물론이고 농경지 토양을 오염하기 때문이다. 공중을 가로지른 전선도 늘어나 두루미 충돌 위험도 높아졌다.
가뜩이나 어려운 철새 모이터, 쉼터 사정은 더욱 나빠질 수밖에 없다. 지난 19일 철원에서 열린 ‘두루미 서식지 보전과 현명한 이용’ 주제의 주민 간담회에서 농민 김희용 씨는 두루미가 머무는 동안에 무차별로 돼지 분뇨 뿌려대는 관행은 그만둬야 한다고 호소했다.
심지어 볏짚 보상금이 나간 논에까지 액비를 뿌리는 건 당국의 관리 소홀 탓이라고 농민들은 짚었다. 철원군 산림환경 채윤병 주무관은 농정 부서와 협의하고 규정을 보완해서 모순을 바로잡겠다고 약속했다.
이현종 철원군수도 올해는 추경예산을 1억 원 늘려 두루미 모이터를 늘릴 계획임을 전해왔다. 최근 철새 도래지 문제가 보도되면서 현지를 방문한 이민호 환경부 자연보전국장에게 군수가 앞장서서 제안했다는 것이다.
철원군은 철새 보호와 지역 활력 높이기에 초점을 두고 다른 여러 시책도 준비하고 있다. 무분별한 이용과 개발 위주 사업을 탈피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의 원칙에 충실하다면 철새 굶주림도 줄고 농민 주름살은 좀 더 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 ‘고수레’, ‘까치밥’ 정신이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 철원 들녘에서 빛을 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