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각종 의류 브랜드와 서점, 식당, 극장이 모여 있는 대형 몰을 찾았습니다. 한파 때문인지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 북적이는 모습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브랜드마다 50% 세일, 70% 세일 등등 할인 행사를 알리는 표지가 붙어있었습니다.
지나치다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고 들어가 가격을 물었더니, "이건 세일 제외 품목인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다지 고가의 옷은 아니었는데, '세일' '세일' '세일' 풍년 속에 제값을 주고 산다고 생각하니 어째 손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냥 "다음에 올게요."하고 돌아 나왔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일의 역설'을 경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모두 값이 내린다고 생각하니 이 옷도 조금 지나면 할인을 할 것 같고, 원래 정가는 부풀려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소비를 오히려 미루는 현상입니다. 디플레이션이 감지되면 물가가 하락함에도 소비가 더 부진해지는 것은 바로 물가가 더 떨어질 것을 예견해서 너도나도 소비를 하지 않게 되는 현상이 확산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선물을 살 일이 있어 회사 근처 백화점에 들렀습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정기세일' 현수막이 큼직하게 눈에 띕니다. 그런데 각 점포마다 또 '브랜드 세일'이라는 표식이 곳곳에 붙어있습니다. 점원에게 물었습니다.
"정기세일은 뭐고 브랜드 세일은 뭐에요?" "정기세일은 백화점 차원에서 하는 거고, 저희 브랜드는 따로 세일을 하는거에요" "근데 차이가 뭐에요? 정기 세일에 추가로 브랜드 세일을 더 해주는거에요?" "아니고요. 저희는 어차피 브랜드 세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기 세일을 하는 혜택과 다를 바 없어요."
유통업체마다 온통 할인행사, 세일, 파격특가 행사가 한창입니다. 소비자의 한사람으로서는 물건 값이 내려가면 나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시작된 정부 주도의 내수경기 살리기를 위한 세일 행사가 계속 이어지면서 '세일 피로감' 또한 확산되고 있습니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 'K세일'로 유통업체들은 재미를 봤습니다. 메르스 등의 여파로 부진했던 실적이 반등했고, 국가 전체적으로도 수출이 마이너스 성장을 할 때 내수 성장세가 그나마 전체 경제성장률을 소폭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부는 올해 들어서도 계속 세일 행사를 밀어붙일 태셉니다. 정부는 올해 경제정책을 발표하면서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를 매년 정례화 하겠다는 계획을 포함시켰습니다. '졸속 추진'이란 비판도 받았지만 지난해 메르스로 꺾인 내수를 살리는데 대대적 세일 행사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성장률을 높이는데 있어 그만큼 쉽고도 달콤한 방법을 포기하긴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백화점, 대형마트 등 유통업체와 의류산업협회, 패션산업협회, 화장품협회 등을 동원하고 대한상의를 엮어 설 연휴 직후에도 다시 대규모 유통업체 공동할인 행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와 달리 제조업체들까지 할인 행사 기획 단계부터 참여시킨 점이 특징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올해도 소비자들은 내내 할인 행사를 경험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번쯤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할인행사에 의존해 판매를 촉진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미 소비자들 사이에서 '세일 피로감'과 '추가 세일을 기대하고 소비를 미루는 현상'이 감지되고 있는 마당에 계속 세일을 밀고 나간다는 것은 득보다 실이 더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통계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코리아블랙프라이데이, K-세일데이 때 잠깐 살아나는 듯하던 유통 경기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3분기 연속 기준치 아래에서 횡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대한상의가 최근 서울과 6대 광역시 944개 소매유통업체를 대상으로 2016년 1분기 소매유통업 경기전망지수를 조사한 결과 1분기 전망치가 96으로 집계됐습니다. 지난해 2분기 100(기준치)을 기록한 이후 3분기 연속 96에 머물러 있는 것인데요. 이런 경기전망지수는 유통업체들이 느끼는 경기 상황을 수치화하는 것으로 지수가 100을 넘으면 다음 분기 경기가 이번 분기보다 나아질 것으로 보는 업체가 그렇지 않은 업체보다 더 많다는 의미이고 100 아래면 그 반대를 뜻합니다.
이 수치를 두고 대한상의는 "지난해 4분기 K-세일데이, 코리아블프 등 소비 진작책이 효과를 거두며 반짝 회복세를 나타낸 소비경기가 새해 들어 다소 둔화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가시적인 경기회복 효과가 확인되지 않는다면 소비심리 역시 큰 폭의 개선을 기대하기는 힘든 실정"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미 온라인과 모바일 시장을 통해 가격을 비교하고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성장세가 정체된 지는 오래된 일입니다. 70%를 할인해서 판다는 건 역으로 볼 때 유통구조에서 얼마나 가격 거품이 끼어있는지를 말해준다는 인식이 소비자들 사이에 팽배해있습니다. "정상가는 정말 정상가인가?"라는 의문이 시작되면 업체들이 가격을 책정하는데 있어서도 부담이 커질 수 있습니다.
유통업체가 체질 개선 없이 '세일'이라는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호흡을 이어간다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격 거품을 걷어내는 노력과 함께 차별화된 브랜드 구성으로 색다른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동시에 진행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