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군 안내면에 사는 이명신(83)씨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요즘 들녘을 볼 때마다 오히려 울화통이 치민다.
밤마다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논바닥을 엉망으로 만드는 멧돼지 때문이다.
참다못한 이씨는 군청에 지원을 요청해 일주일 전 엽사들의 도움으로 멧돼지 2마리를 포획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또 멧돼지가 나타나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엔 벼를 훑어 먹거나 쓰러뜨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논둑까지 마구 파헤치고 농기계 출입로까지 끊어놓아 그나마 성한 벼조차 수확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이씨는 "멧돼지가 싫어한다는 흰색 천조각을 논 가장자리 여러 곳에 꽂아두고 개까지 풀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며 "이 상태라면 수확할 벼가 남아날지 걱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인근에서 복숭아와 고구마 농사를 짓는 김정순(69·여)씨도 하루가 멀다고 출몰하는 멧돼지 때문에 수확을 포기해야 할 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며칠 새 500평이 넘는 고구마밭 3분의 2가 폭격을 맞은 듯이 파헤쳐졌다"라며 "한 달 전 옥수수도 큰 피해를 봤는데, 이젠 멧돼지 등쌀에 농사지을 기력도 없다"고 푸념했다.
수확 철을 맞아 풍성해야 할 농촌 들녘이 시도때도없이 출몰하는 야생동물 습격에 시름하고 있다.
농민들은 전기울타리를 치고 허수아비와 경음기, 경광등까지 동원해 정성 들여 가꾼 농작물 사수에 나서지만, 야음을 틈타 출몰하는 야생동물을 막는 데 한계를 느낀다.
◇ 최근 5년 전국 피해액 643억원…멧돼지·고라니가 주범 지난 5년간 전국에서 발생한 야생동물로 인한 농작물 피해는 643억2천900만원에 달한다.
2011년 154억5천400만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다소 주춤해졌지만, 여전히 한해 100억원 넘는 농작물이 야생동물 먹이가 되고 있다.
주범은 천적이 없어 갈수록 개체수를 늘고 있는 멧돼지와 고라니다.
두 동물에 의해 5년간 발생한 농작물 피해액은 295억6천300만원과 126억1천800만원으로 집계됐다.
전체 피해액의 65.6%를 차지하는 규모다.
가장 많이 해를 입은 농작물은 벼(126억3천200만원)로 나타났고, 채소(117억8천800만원)·사과(56억5천700만원)·배(45억4천100만원)·포도(13억4천600만원)·호도(5억1천200만원) 등이 뒤를 이었다.
환경부 관계자는 "지방자치단체별로 유해 야생동물 구제단을 운영하고, 전기울타리 등 피해방지시설을 갖추면서 계속 늘어나던 농작물 피해가 감소세로 돌아선 상태"이라고 설명했다.
◇ '늘어나는' 멧돼지, 도심도 제 집 드나들 듯 지난해 국립생물자원관이 조사한 국내 멧돼지 서식밀도는 100㏊당 4.3마리이다.
2010년 3.5마리에 비해 0.8마리 늘었다.
전북이 7.2마리로 전국에서 가장 밀도가 높았다.
고라니 서식밀도 역시 100㏊당 8.2마리로 5년 새 1.8마리가 늘었다.
충남은 무려 12.2마리에 달했다.
개체수 증가로 영역싸움이 심해지면서 경쟁에서 밀린 야생 동물들이 도심까지 내려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까지 속출하고 있다.
최근 경기도 의정부시 도심과 북한산 등산로 입구에 일주일 새 3차례나 멧돼지가 나타나 주민들을 긴장시켰다.
이달 9일 의정부시 용현동의 한 미용실에 들이닥친 멧돼지는 경찰이 쏜 권총 실탄 2발을 맞고 사살됐다.
지난달 18일 강원도 인제군 남면의 안모(81) 할머니 집에도 멧돼지 3마리가 나타나 거실과 방안까지 들락거리면서 난동을 부렸다.
지난해 서울시내에 멧돼지가 출현한 사례는 199건으로, 1년 전 135건보다 47.4%(64건) 늘었다.
2011년 6건이던 출몰 횟수가 이듬해 294건으로 증가했다가 2013년 135건으로 주춤하는 듯하더니 다시 증가세로 돌아선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도시개발에 따른 서식지 교란이나 북한산 멧돼지 중 영영 다툼에서 밀린 수컷들이 도심에 내려오는 경향이 있다"며 "14개 자치구에 멧돼지 기동포획단을 구성하고 소방서, 야생생물관리협회 등과 긴밀한 대응체제를 마련해 운영중"이라고 말했다.
◇ 눈물겨운 퇴치 활동…피해 보상은 '쥐꼬리'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에서 벼농사를 짓는 유동열(55)씨는 해마다 되풀이되는 멧돼지 피해를 막고자 논 주변을 그물망으로 둘러쳤지만 헛수고였다.
그물망을 뚫고 들락거리는 멧돼지가 수확을 앞둔 벼 이삭을 훑어 먹거나 마구 짓밟아 진흙 범벅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유씨는 "시에서 운영하는 유해동물 구제단에 포획을 요청해도 야음을 틈타 움직이는 멧돼지를 몰아내는 데는 역부족"이라며 "수확을 앞둔 농작물을 지키기 위해 밤잠을 설치면서 야간순찰에 나서는 농민까지 있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이같은 농민 피해에 대한 보상 절차는 까다롭고 금액도 많지 않아 상처 입은 농심을 위로하지 못하고 있다.
강원지역 시·군이 지난해 904건의 농작물 피해에 대해 지급한 보상금은 5억7천600만원에 불과하다.
1건당 63만원인 셈이다.
충남 서산시도 지난해 야생동물 피해를 본 21곳에 내준 보상금 총액이 1천132만원에 그쳐 1건당 평균 53만원꼴에 불과했다.
세종시 연서면에서 묘목 농사를 짓는 한 농민은 "지자체마다 상한액이 정해져 있어 현실성 없는 농작물 피해보상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 농작물 피해 줄일 대책 없나 야생동물로 인한 농작물 피해를 줄이려면 우선 포화상태에 이른 개체수 조절이 시급하다.
제주도가 2013년 이후 야생 노루 포획에 나서 농작물 피해를 줄인 게 좋은 사례다.
제주도는 노루에 의한 농작물에 피해가 잇따르자 2013년 7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2천973마리의 노루를 포획했다.
이 덕분에 2012년 87㏊던 농작물 피해면적은 이듬해 78㏊, 지난해 61㏊로 줄었다.
제주도 관계자는 "노루의 개체수를 인위적으로 줄이면서 전기울타리 등 피해방지시설을 확대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반대의견도 만만찮다.
강원도 야생동물구조센터의 김종택 센터장은 "산림훼손 등으로 서식지가 좁아진 야생동물이 인간의 생활권에서 충돌하는 문제를 줄이려면 자연과 공존하는 균형잡힌 도시개발계획이 먼저 수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야생동물이 서식할 수 있는 공간 확보가 우선이라는 얘기다.
전남도는 겨울철마다 3∼4곳의 시·군을 묶어 수렵장을 운영하고, 유해 야생동물 구제단을 풀어 적극적인 포획에 나서면서 2013년 15억3천700만원이던 농작물 피해를 지난해 절반으로 줄였다.
그러나 동물보호단체 등은 순환수렵장 운영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
환경부 관계자는 "농촌이라도 아파트 등이 들어선 곳에서 총기나 사냥개를 동원한 수렵활동을 허용하기는 쉽지 않다"며 "이 때문에 피해방지시설을 갖추는 쪽으로 유도하는 지자체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