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가 기록한 '민주주의자' 고 장준하 선생에 대한 요약적인 인물평은 "온순하나 날카로움"이었습니다.
또한 사상관계에 대해선 "반공정신이 투철하며, 사상이 온건하다"고 평했습니다.
무려 2천 쪽에 이르는 장준하 동향 보고 자료는 현재 국가기록원에 보관돼있습니다.
70년 비공개 자료로 묶여 일반에는 공개할 수 없는 자료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2003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의문사 관련 조사관으로 활동했던 고상만 씨가 개인적으로 입수한 '동향 보고' 자료를 토대로 고인의 40주기 추모 평전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를 펴냈습니다.
고 씨는 "중정 기록엔 선생을 대상으로 한 사찰과 미행, 도청, 사설 정보원을 활용한 정보 수집 등 불의한 권력 실태가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며 "그간 출간된 연구서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고인의 여러 발언들과 행적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귀중한 연구 자료"라고 말했습니다.
저자는 장준하가 한국 근현대사에 남긴 수많은 흔적과 달리 살아온 기록은 그다지 남아있지 않은 현실에 주목합니다.
직접 쓴 기록으로는 1971년 4월 19일에 발간된 항일 수기 '돌베개' 정도입니다.
"누구도 장준하의 외침을 기록으로 쓰거나 남길 수 없었다. 단 한 곳만은 예외였다. 장준하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담아 기록하고 보관해둔 곳이 유일하게 있었다. (중략) 중앙정보부이다." (23쪽)
저자는 중정 기록을 통해 1967년 4월 22일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장준하의 연설 전문을 앞세워 공개했습니다.
전문엔 당시 권력의 2인자인 김종필을 향한 거침없는 비판을 비롯, 정권의 해외차관 비리에 대한 신랄한 비판 내용이 담겼습니다.
또한 월남전쟁 참전과 관련해 특권층 자제의 병역 면탈 실태를 고발했으며, 최고 권력자의 사상적 정체성 문제 등을 직접적으로 문제삼는 대목들이 나옵니다.
고인에 대한 당시 정권의 탄압이 본격화된 것도 이 연설 직후였습니다.
중정은 유세장을 찾은 유권자와 주요 관계자를 대거 소환해 유세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으며, 현재의 형법에는 존재하지 않는 '국가원수 모독죄'를 적용해 장준하를 체포해 서대문구치소에 구속시켰습니다.
저술엔 1973년말 유신정부를 긴장시켰던 장준하 주도의 개헌 청원 100만 인 서명운동의 상세한 전모도 담겼습니다.
이에 따르면 중정 또한 당시 서명자가 30만 명에 달했다고 파악했습니다.
인터넷이 없는 시절임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동참 열기가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이후 장준하가 긴급조치 1호의 첫 구속자가 됐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저자는 동향 기록 입수와 관련해 "지난 2012년 9월쯤 모 방송사 기자의 취재 의뢰를 받고 국가기록원에 관련 기록이 있으며 70년 비공개로 묶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당시 담당자와 통화해 문의하니 '실무자는 그런 것을 모른다'며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얼버무렸는데, 추후에 기자에게 열람은 허용했다고 한다"며 "국가기관의 행태로는 이해할수도, 있을 수도 없는 행위이며, 근거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SBS 뉴미디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