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에 푹 빠졌습니다. 만화라는 비교적 수용하기 쉬운 매체를 통해 어려운 조선왕조실록 내용의 가능한 최대치를 담아냈습니다. 단편적으로 봤을 때 이해하기 어려웠던 조선의 역사적 현상들을 한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이해는 수긍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선택과 행동의 논리를 알게됐다는 뜻입니다.
어떻든 과거 한 일간지를 통해 촌철살인의 만평으로 복잡한 사회현상을 간단명료하게 풀어낸 박 화백의 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됐다는 평입니다.
그런데 20권에 담긴 조선시대의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세 장면이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았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또 조선말 외세가 물밀듯이 밀려오기 전 조선 지배층의 행태입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 앞에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매번 놀랄 만큼 똑같았습니다. 무기력과 무책임, 무대응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에는 이미 숱한 경보음이 울렸고 그 소리는 점점 커졌습니다. 심지어 상대방인 대마도 도주가 일본의 침공 계획을 알려주기까지 했습니다. 조선 정부도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이후 전쟁에 대한 대비는 거의 없었습니다. 조선 지배층의 대응은 '설마 전쟁이 나겠어. 나더라도 우리 군이 잘 막아낼 수 있겠지'였습니다.
병자호란은 더 합니다. 이미 정묘호란을 겪었습니다. 청나라는 침공하겠다고 공공연히 경고를 보내왔습니다. 이쯤되면 지도부는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하거나, 불가피하다면 전쟁에 이길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역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명나라가 도와주겠지. 운이 좋으면 이길 수도 있을거야'라는 막연한 기대 뿐이었습니다. 나와 상대방에 대한 냉정한 평가, 그에 따른 전략전술적 대응책 마련 등은 간데 없고 그저 원리원칙에 따른 탁상곤론만 이어갔습니다.
조선말 상황은 어떻습니까? 하늘 같이 떠받들던 중국이 외세에 의해 망신창이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는 다르다'만 외쳤습니다. 어떻게 다를 수 있을지에 대한 대비나 대책도 없이 말입니다.
그 결과는요? 아시는대로 국토가 말발굽에 짓밟히고 국민은 도륙이 났으며 최종적으로 나라를 잃기까지 했습니다. 반복되는 역사적 변란 속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비극을 되풀이 했습니다. 이쯤되면 우리 지배층에게 학습능력이 아예 없었던 것인가 의아할 지경입니다.
문제는 최근 우리나라가 당면한 상황이 앞서 말씀드린 조선 역사의 세장면과 데자뷔를 일으킨다는 점입니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감행하려 한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다수 북한 전문가들은 타이밍의 문제일 뿐이지 북한은 4차 핵실험에 나설 것이라고 내다봅니다. 중국이 자신들을 전략적으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 아래 북한으로서는 핵실험으로 인해 당할 추가적 제재보다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4차 핵실험에 성공할 경우 북한은 명실상부한 핵 보유국이 됩니다. 핵탄두로 만들 만큼의 소형화 기술은 물론, 우라늄탄이나 수소 폭탄 등 한층 강력한 핵무기 기술을 완성할 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이 땅에서 핵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훨씬 커집니다.
그런데 북한의 이런 움직임을 막기 위해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북한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미국과 중국에 강력한 제재를 요구할 뿐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강대국들의 눈치만 보는 조선시대의 상황과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우리도 신뢰 프로세스를 제시하며 북한측의 변화를 유도하는데 북한이 말을 안듣는 것이다'라고 반박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맞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신뢰 프로세스 정책이 가동되기 위한 필수 전제조건이 무엇입니까?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죠. 그러면 지금 상황에서 북한이 먼저 핵을 내려놓을 가능성은 얼마일까요? 대부분의 전문가는 0%로 봅니다. 북한이 자신들의 헌법에까지 핵무기 개발을 명시해 놓은 상태에서 이를 뒤집을 정도의 강력한 유인책을 내놓지 않는한 우리의 대북정책은 그 전제를 총족시키는 것부터 불가능합니다.
그러다보니 과거 MB 정권부터 현 정권까지 대북정책은 식물화된 상태입니다. 앞으로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날 가망성도 보이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북한 문제에 대해 능동적인 어떤 수단도, 방법도 취하지 못한 채 북한이 제풀에 넘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형국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각종 제재를 가하고, 돈줄을 죄면서 8년을 기다렸는데 북한은 여전히 차근차근 핵무기를 개발해가고 있습니다. 점점 더 그럴듯한 핵무기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런 능동적인 대처도 취하지 않은 채 '어떻게 되겠지, 잘 되겠지' 하며 무기력하게 위기를 심화시켰던 조선 지배층의 행태와 똑같지 않습니까?
많은 전문가들이 강조합니다. 현재 박근혜 대통령이 직면한 외부 환경은 대북 문제 해결을 위해 무언가를 시도하기에 대단히 좋다고요. 일단 한반도문제에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두 축인 미국, 중국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유사 이래 미국, 중국과 동시에 이렇게 우호적인 관계 설정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운신할 공간이 넓다는 얘기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대북 정책에 대해 미국과 중국이 사시로 바라볼 여지는 적다는 뜻입니다.
또한 박 대통령이 보수파의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도 유리한 점입니다. 같은 일을 진보파의 지도자가 시도할 때보다 '종북'이나 '좌파'라는 오해를 부를 가능성이 매우 작습니다.
이런 절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에서 우리 정부는 그저 악화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일단 4차 핵실험을 막을 수 있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움직임부터 보여야 합니다. 북한이 신뢰를 얻는 행동을 하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하도록 강하게 유도해야 합니다.
훗날 우리 후손들이 오늘의 역사를 보면서 또다시 지배층의 무기력과 무능력, 무대책을 한탄하도록 만들면 안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