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눈이다. 초저녁부터 눈발이 날리더니 아침에 일어나보니 발이 푹푹 빠질 정도다. 25cm는 족히 돼 보인다. 워싱턴 시간으로 3월 17일이다. 봄이 오는가 싶더니 또 겨울, 겨울이다. 지난주 서머타임까지 시작됐는데 폭설이라니. 날씨가 요술을 부린다. 미국에서 봄이 시작되는 날은 공식적으로 3월 20일 춘분이다. 그래도 사흘 남았다고 겨울이 심술인가보다.
TV엔 지역 내 휴업하는 학교들을 알리는 자막 스크롤이 끊임없이 흐른다. 거의 전부다. 지난 겨울 폭설로 학교 문을 닫은 날이 많아 이제는 하루 쉬면 방학이 하루 줄어들 지경이다. 연방공무원들 역시 휴업이다. 덕분에 어렵사리 만든 취재 약속 하나도 깨졌다. 학생들과 공무원들은 밤사이 한 차례 눈을 비비며 인터넷을 열었을 게다. OPM (Office of Personnel Management) 연방인사관리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CLOSED' 문을 닫았다는 표시가 빨간색으로 선명하다.
부처 형편에 따라 휴가 격으로 아주 쉬는 경우도 있지만, 이를테면 '통신축선상 대기' 상태다. 주 정부, 워싱턴 DC 정부가 웬만한 일을 하니 연방 공무원들이 하루쯤 안 나와도 큰 탈은 나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필수 요원들은 걸어서라도 나와야 한다.
사실 오늘 출근하면서는 '이 정도 눈으로 연방정부가 문을 닫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큰 길 눈은 일찌감치 다 치웠고, 그래도 봄이 코앞인지라 눈이 얼어붙지도 않았다. 꼭 2주전 눈폭풍 때와는 땅의 기운이 달랐다. 그래도 미국은 나름 움직이는 원리가 있다. 대부분 차를 몰고 출근하는데 접촉 사고 두세 건이면 고속도로는 마비다. 사고 위험에다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느니 차라리 쉬고 다음 날 잘 나오는 게 낫다는 공감대가 있는 것 같다.
제일 바쁜 사람은 출근 안 하고 재택근무를 하는 백악관의 주인 오바마 대통령, 그리고 그 참모들이다. 물론 백악관 출입 기자들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취재 현장에 나와 아침뉴스부터 중계차를 '타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오바마 대통령이 오전부터 긴급 기자회견에 나섰다.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 분할 사태로 국제 사회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터였다. 단호한 표정으로 우크라이나 구 정부 인사들과 '배후' 러시아에 대한 2차 제재안을 담은 행정명령을 공표했다. 그리고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인 압바스와 회동에 들어갔다. 난항을 겪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 중동 평화협상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공교롭기도 해라. 꼭 2주전 눈폭풍에 연방정부가 문을 닫은 날 오바마 대통령은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백악관에서 맞았다. 그리고 오늘 다시 폭설로 연방정부가 폐쇄된 날 압바스 팔레스타인 수반을 손님으로 맞은 것이다.
봄을 시샘하는 눈일까, 평화를 시샘하는 눈일까? 아니면 평화를 기원하는 서설일까? 꼬여만 가는 국제 관계에서 중동 평화든 우크라이나 사태든 북핵 문제든 어느 것 하나 잘 풀리는 게 있어야 할 텐데... 눈을 밟으며 잠시 상큼해졌던 머릿속이 금세 복잡해진다. 웃기는 트위터에 잠시 웃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봄이 왔음을 알리는 행정명령을 공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