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컴퓨터를 만나기 전엔 그게 뭔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어마어마한 성능의 컴퓨터이겠거니 생각했죠. 엄청난 CPU나 메모리가 들어있을 거라는 짐작도 했습니다. 근데 아니더군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 있는 우리 슈퍼컴퓨터 4호기(가이아+타키온2)는 물론 상당히 성능 좋은 CPU와 메모리를 장착하고 있었지만, 그게 일반 컴퓨터의 수천 배만큼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슈퍼컴에서 하나의 단위가 되는 이른바 ‘노드’는 최고급 사양의 컴퓨터보다 2~3배 좋기는 하지만 ‘슈퍼’까지는 아니죠. 근데 그 노드를 3,200개 연결했으니 ‘슈퍼’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슈퍼컴퓨터는 마치 하나의 커다란 무리로 움직이는 연합군 같습니다. 노드 하나하나의 성능을 하나로 합쳐 연합군의 단일 전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슈퍼컴의 기술이라고 합니다.
KISTI 국가슈퍼컴퓨팅센터에 들어가면 타키온2의 성능을 알기 전에, 일단 너무 시끄럽습니다. 옆 사람과 대화가 안 됩니다. 슈퍼컴퓨터는 시끄럽기로도 슈퍼급인 것입니다. 우준 슈퍼컴퓨팅서비스센터 실장은 컴퓨터의 팬 돌아가는 소리라고 큰소리로 설명했습니다. 겨우 알아들었습니다. 슈퍼컴퓨터 4호기 가운데 먼저 들어온 가이아(IBM)는 공랭식, 즉 팬으로 바람을 불어 컴퓨터 열을 식히는 방식이라 그랬습니다. 시커먼 몸집의 가이아는 한 대 안에 PC 96대가 들어가 있습니다. 슈퍼컴 꽁무니에 손을 대보니 뜨거운 바람이 후끈했습니다. 자체 팬으로 열을 식히기엔 한계가 있는지, 가이아가 놓인 바닥에서는 에어컨 바람이 뿜어져 나오고, 값진 냉기를 빼앗길세라 가이아 슈퍼컴 전체는 추가 공사로 밀폐돼 있었습니다. 슈퍼컴퓨팅센터 바닥에 거대한 에어컨이 있는 셈인데, 1년에 전기료만 30억 원이 나오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시끄럽고 비싼 장비, 굳이 가동하는 이유는 그만큼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은행처럼 대기 순서를 기다려야 슈퍼컴으로 업무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오래 걸리는 계산을 맡기려면 대기는 필수가 됐습니다. 슈퍼컴퓨팅센터 관계자는 슈퍼컴에 계산 4개를 던지면 1개 정도는 최소한 12시간, 길면 며칠씩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기 시간도 슈퍼죠. 슈퍼컴퓨터로 뭔가를 해보고 싶은 기업이나 연구진은 신청서를 내기만 하면, KISTI에서 기술과 인력, 소프트웨어까지 지원해 연구를 돕습니다. 전체 슈퍼컴 사용 사례의 절반가량은 무상이고, 나머지 절반은 돈을 내고 이용한다고 합니다. 보통 한 구좌에 100만 원, CPU 25,000~30,000시간을 이용하는 값입니다. 슈퍼컴에서 CPU 1,000개를 1시간 이용했으면 1,000시간 쓴 것으로 계산합니다.
슈퍼컴 가동 몇 만 시간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로 슈퍼컴을 이용하면 연구 개발 기간과 비용이 대폭 줄어듭니다. 슈퍼컴에 대한 산업적 수요가 급증해온 핵심적인 이유죠. 최근 한 중소기업도 과일이나 야채의 즙을 짜주는 원액기 신제품을 개발했는데, 슈퍼컴퓨터 4호기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슈퍼컴퓨터로 원액기 속 스크루의 디자인을 설계한 겁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차이가 없어 보이는 가상의 스크루 4개를 슈퍼컴으로 전산 분석해 즙을 가장 많이 짜낼 수 있는 디자인이 선택됐습니다. 물론 시제품은 만들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스크루 개발 비용은 2억9천2백만 원, 개발하는데 딱 1년(2012.6~2013.6) 걸렸습니다. 재료에서 즙을 얼마나 짜낼 수 있느냐를 뜻하는 착즙률은 82.6%까지 끌어올렸습니다. 기존 착즙률은 70%대였습니다. 원액기 시장의 성장과 함께 매출도 껑충 뛰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감자 칩 프링글스의 그 단순한 디자인을 설계할 때 슈퍼컴퓨터를 활용했습니다. 감자 칩이 생산 설비에서 이동할 때 바람에 하도 날아가는 바람에 골칫거리였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슈퍼컴으로 감자 칩 주변의 공기 흐름을 분석했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차량 주변의 공기 역학을 계산해 자동차를 디자인합니다. 우리나라도 영화 ‘국가대표’의 스키점프 신을 비롯해 영화와 드라마에서 수많은 명장면을 슈퍼컴이 연출했고, 원액기와 김치냉장고 설계, 독감 바이러스 변이 예측, 미생물 배양기 개발, 크레인 설계 검증, 탱크 엔진 설계, 자동차 엔진 피스톤 개발 등 슈퍼컴 오지랖이 넓어도 좀 넓은 게 아닙니다. 참, 심지어 막걸리 병도 디자인합니다. 이 정도면 슈퍼컴으로 안 하는 게 뭐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슈퍼컴 앞에 줄을 서는데 다 이유가 있습니다.
슈퍼컴 앞의 대기 시간은 앞으로 점점 길어질 것 같습니다. 타키온2의 나이는 올해 5살. 아직 쓸 만 하다고는 하는데 능력은 힘에 부치는 듯 보입니다. 2009년 성능 면에서 세계 14위로 등장했지만 지금은 137위까지 떨어졌습니다. 순위 하락은 세월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거대한 연산에 역부족을 느끼는 건 문제입니다. 지금 세계 1위 성능을 뽐내는 중국 슈퍼컴퓨터 ‘은하2호’는 우리 성능의 100배입니다. KISTI 관계자는 중국이 묻지마 슈퍼컴 투자를 하고 있다고, 부러움 섞인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미국과 중국, 일본 모두 2020년을 목표로 엑사플롭스(1초에 100경 번 연산)급의 슈퍼컴 구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키온의 뒤를 이을 5호기 구축 사업을 이제 막 시작했지만, 그게 지금 중국의 ‘은하2호’ 성능 수준이라고 합니다. 슈퍼컴은 쩐의 전쟁 같습니다.
4호기 업그레이드해서 쓸 수는 없나요? CPU 성능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CPU 수천 개를 묶어서 칼같이 하나로 움직이도록 하는 게 쉽지 않은데, 업그레이드한다고 성능이 더 좋은 CPU를 붙여버리면 연합군 형성이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계산을 서로 나눠서 처리한 뒤 다시 합쳐서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데, CPU 성능이 모두 똑같지 않으면 누군가 늦어집니다. 계산 끝낸 똑똑한 CPU들이 아직도 계산중인 멍청한 CPU를 기다려야 하는 것, KISTI 관계자는 이걸 ‘하향 평준화’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슈퍼컴퓨터는 CPU를 교체하는 업그레이드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4호기가 맥을 못 추면 5호기로 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슈퍼컴 5호기 구축 사업이 시작된 이유입니다. 본격적인 5호기 서비스를 시작하려면 2016년 말은 돼야 할 것 같다고 하니, 그때까지는 4호기가 좀 더 열을 내면서 고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슈퍼컴 5호기 예정 부지에서는 사람들이 축구를 즐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