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뉴스

[취재파일] '죽은 교과서'를 향한 '살아 있는' 외침


구글에서 SBS뉴스 즐겨찾기 추가
대표 이미지 영역 - SBS 뉴스

“대한민국 법정에서 교과서 때문에 원고가 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일본 법정에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25년을 싸워왔습니다. 교학사 측에 질문하고 싶습니다. 교과서란 무엇입니까.”

지난 7일 서울 서부지방법원에서 ‘교학사 교과서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 첫 재판이 열렸습니다. 교학사 교과서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한국사 피해자들이 소송을 낸 겁니다. 법정에는 가처분을 신청한 한국사 피해자들과 양측 변호인이 참석했습니다. 워낙 세간의 주목을 받는 사안인지라 취재진도 제법 모였습니다. 방청석을 꽉 채운 50여 명이 모두 재판을 주시했습니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교학사 교과서의 역사 서술에 오류가 있는지, 그리고 수정본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먼저 한국사 피해자들은 교학사 교과서에 오류가 있다며, 비록 대부분 학교에서 교과서 채택을 철회했지만 보조교과서로 쓰는 학교들이 남아 있어 가처분 신청에 이르게 됐다고 신청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이후 양측 대리인의 날 선 공방이 오갔습니다.

교학사  “일제를 찬양하는 내용이 아니고 종전에 역사학계에서 공인된 서술을 참고해 저술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부합하는 서술이다.”
 “신청인은 일부 표현상의 문제를 침소봉대하거나 왜곡해서 친일사상을 주입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가 되는 표현들을 수정해 2월에 최종 배포되는 교과서에 반영하겠다.”
한국사 피해자  “이미 최종 본에 대한 교과서 검정이 끝났는데 이후 내용을 수정하는 건 절차상의 문제가 있다.”
 “표현이 아니라 맥락이 문제다. 일부 표현을 수정하더라도 일제를 찬양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맥락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수정본도 수용할 수 없다.”

재판부의 심문이 끝난 뒤, 가처분을 신청한 한국사 피해자들의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법정엔 신청인 9명 가운데 4명이 참석했습니다. 외형에서부터 유구한 역사가 묻어나는 어르신 한 분 한 분이 각자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들은 단어 하나마다 감정을 담아 힘주어 말했습니다.

----------

“오늘 이 자리에서 교학사 측 변론을 들으면서 좀 거칠게 표현한다면 ‘아 사람이, 지식인들이 저렇게 타락할 수 있겠구나’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식민 지배를 긍정적으로 기술하려는 의도와 맥락이 곳곳에서 완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여러 번 수정해오는 과정에서 그 의도는 전혀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이른바 친일 반민족 세력, 기득권 세력이 주장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일관되게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들, 신채호, 김구 이런 분들은 일본이 조선에 근대 시간관념을 갖게 하는데 방해한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이 책은 도저히 한국 사람이 만든 교과서라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 후쇼사 교과서의 부록 정도의 수준입니다. 이런 책이 단 한 권이라도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김원웅 / 독립운동가 후손

----------

“대한민국 법정에서 교과서 때문에 원고가 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일본 법정에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25년을 싸워왔습니다. 교학사 측에 질문하고 싶습니다. 교과서란 무엇입니까. 일제 식민지가 마치 살기 좋았던 시기처럼 많이 발전되었다고 미화하고 있습니다. 강제동원 규모도 많이 되었다는 식으로 정확히 서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피해자들을 두 번 세 번 죽이고 울리고 아픈 상처를 파헤치는 것입니다. 경제발전과 동시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우리 국민 모두가 심한 모멸감을 느끼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이 교과서에는 없습니다. 지금 야스쿠니도 얼마나 문제입니까.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미화하기 위한 그런 곳입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도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이 교과서를 어떻게 인정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두루뭉술합니다. 지금은 두루뭉술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입니다. 진상규명특별법도 만들어졌고 지금 만드는 교과서에는 그런 걸 반영해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는 우리나라가 민족적으로 잊어서는 안 될 아픔입니다. 제 부모와 가족의 아픔이기도 하지만 민족적인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활동하는 이유입니다.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지만 아픔 하나만 가지면 압니다. 교과서로서, 제대로 서술해주길 바랍니다.”

- 이희자·/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

“전국 산골짜기에서 엄청난 학살을 당한 우리와 유족들에 대해 단 몇 줄로 그 사안을 판단하고 있는 걸 봤을 때 참으로 속이 터졌습니다. 처형은 법적인 절차에 의했을 때 그 용어를 쓴다는 것을 법관님도 잘 알 것입니다. 처형과 학살을 어떻게 동일 선상에 놓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008년 1월 24일 故노무현 대통령이 울산 보도연맹 추도사에서 국가 공권력으로 학살한 거에 대해 공식 사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부분은 한 줄도 수록하지 않는 보도연맹 자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보도연맹원들은 지금도 당연히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가르치는 겁니다. 보도연맹뿐만 아니라 인공 치하 3개월 동안 완장 찼다고 부역했다고 지방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습니다. 엄청난 동족상잔에 대해서, 이 땅에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걸, 교과서에서 미래를 짊어진 학생들한테 보여줘야 합니다. 이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 박용현 / 보도연맹사건 피해자 유족

----------

“교과서는 없는 것을 미화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해야 합니다. 제주 사건에 대해서 모든 사건을 남로당이 일으킨 것으로 보고 (물론 일부는 거기 해당되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은 전혀 기술이 안 된 상태입니다. 비참한 사건을 지금까지 보고 참아왔는데, 사건이 보는 각도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느끼면서 정말 피가 역류했습니다. 표현 하나도 어 다르고 아 다릅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눈으로 직접 보고 무서워서 고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내용은 어디 있습니까. 앞으로 교과서는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 강종호 / 제주 4.3사건 피해자 유족

발언을 마친 신청인 한 분은 말할 기회를 줘서 고맙다며 판사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가처분 신청인으로서 법정에서 발언하는 건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내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오래 얘기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주눅 든 모습에서 그들 세대가 겪었을 억압의 세월이 느껴졌습니다.

신청인들의 발언이 끝나고 박희승 부장판사는 “현대사 강의를 들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법정에 있었던 모든 이들이 그랬을 겁니다. 역동의 시대를 살아온 장본인들의 말을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가처분 신청인인 동시에 법정에 선 역사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교학사는 사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서술했다고 주장하지만 역사 속에 숨 쉬어온 이들은 반문합니다. 그 교과서에 도대체 우리는 어디 있느냐고.

광고
광고 영역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광고
광고 영역
광고
이 시각 인기기사
기사 표시하기
많이 본 뉴스
기사 표시하기
광고
광고
광고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