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꾸 일본놈하고 사진을 찍으라고 해!"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86)는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독일의 베를린에서 7년 만에 만난 야지마 츠카사(42)씨를 가리켜 스스럼없이 "일본놈"이라고 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할머니의 표정에는 정감이 가득했다.
"내가 한국 여자하고 결혼하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독일 여자 만나서 여기까지 왔네"
와세다 대학을 나와 아사히 신문 출판국 사진기자로 일했던 야지마씨는 2003~2005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참회의 봉사활동을 하면서 이옥선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보장된 앞날을 포기하고 한국을 찾아 고달픈 봉사의 길을 걷기로 한 이유에 대해 "가해 국민의 한사람으로 할머니들이 받은 고통을 나누고 침략전쟁으로 인한 나쁜 역사에 대해 일본인들이 좀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독일어와 한국어가 유창한 야지마씨는 이 할머니가 지난달 28일부터 독일 도시를 돌면서 증언활동을 시작하자 통역을 자처했다.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8년째 독일에서 사는 야지마씨는 나치 전범들의 단죄와 피해자 보상에 적극적인 독일 정부의 책임있는 자세를 일본 정부에게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는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일본 정부는 정권이 바뀌어도 도무지 변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정치인들이 비윤리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할머니의 증언이 시작되자 2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베를린공대 강의실의 좌석이 꽉 차 일부는 선 채로 들어야 했다.
15살 때 강제로 중국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고초를 겪은 생생한 증언이 계속되는 동안 청중은 숨죽인 채 경청했다.
"그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도살장이었다"며 일본군이 위안부를 끔찍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자 일부 청중들은 눈을 감거나 눈시울을 붉혔다.
한 독일인 청중이 "세 가지 소원을 말해달라"고 청하자 할머니는 "빼앗긴 인권과 명예를 회복하는 것 뿐"이라며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조국은 해방을 맞았지만 우리는 해방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아직도 전쟁 중입니다."
증언이 끝나자 독일에 사는 일본인 여성인 아키코 츠카모토씨가 연단으로 나와 위안부 범죄 관련 일본 정부의 진실 왜곡 사례를 설명했다.
아키코 씨는 "일본 정부는 위안부들이 돈을 벌려고 스스로 일하러 간 것이고 돈을 벌어서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고 국민을 거짓으로 속이고 있다"고 고발했다.
이어 패널 토론에서는 또 다른 일본인인 도이 카추시게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독일 마부르크대학 법학 박사과정에서 전쟁 범죄를 공부한다는 그는 "일본과 독일은 똑같이 전쟁 범죄를 저질렀지만, 독일은 과거사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러나 일본은 첫 걸음인 사실 인정도 하지 않으면서 배상했다고 한다"고 규탄했다.
독일인들은 일본 정부가 과거사를 부정하면서 독일 정부와 다른 길을 걸어온 원인을 두고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다.
방송기자 출신인 퀸터 크나베(71)씨는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독일 나치 정권이 자행한 만행의 증거물들을 철저하게 보관해 국제사회에 고발했다"면서 "독일은 꼼짝없이 과거를 인정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고 조언했다.
대학에서 일본학을 공부한다는 프란치스카 클로제(22.여)씨는 "독일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과거의 잘못에 관해 철저히 교육받지만, 일본은 학교에서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3일 저녁 7시(현지시각)에 시작한 이날 행사는 참석자들의 열띤 토론이 길어지면서 4시간 가까이 진행됐지만, 대부분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등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베를린=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