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선고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오원춘 사건이 말이죠. 100석인 법정 좌석이 꽉들어 찼습니다. 오전 10시,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민사, 행정 등의 판결을 먼저하고 형사 사건 판결은 마지막에 한다"는 신영철 대법관의 짧은 설명 이후 판결이 시작됐습니다. 네명의 대법관이 돌아가며 판결문을 읽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판결이 진행되는 내내 말입니다.
2심 재판에 불복해 대법원에 재판을 구하는 것을 '상고'라고 합니다.(1심 재판에 불복해 2심을 구하는 것은 '항소'이고요) 대법원은 2심 재판에 문제가 없는 경우, 상고를 기각하거나 각하하고 문제가 있으면 판결을 깨고 되돌려 보냅니다.(기각은 '따져보니 결론이 문제없다'는 것이고, 각하는 '이건 재판부가 따져볼 사항도 아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통 대법원의 재판 결과는 '상고 기각'이 많습니다)
대법원은 법률심을 담당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흔히 TV에서 보던 장면(증인을 불러 사건에 대해 논쟁하거나, 검사와 변호사가 논쟁을 벌이는 등의)의 장면은 볼 수 없습니다. 재판의 성격이 다른 것이지요. 오로지 이전 재판(2심)에서 법률 적용을 잘 했는지만을 봅니다. 사실관계나 양형을 이유로는 상고할 수 없습니다.
재판이 시작되고 50분쯤 후, 오원춘 사건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상고 기각. 오원춘 사건은 검찰이 '양형이 적다'며 상고했던 사건입니다. 가만.. 양형을 이유로 상고할 수 없다더니, 상고를 했다고? 그리고 상고 기각판결이 나왔다고? 기각이 아니라 각하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왜 각하가 아니라 기각일까요? 검찰은 어떻게 양형을 이유로 상고를 할 수 있었던 걸까요? 검찰 상고의 근거는 형사소송법 383조 4호였습니다.
** 제383조(상고이유) 다음 사유가 있을 경우에는 원심판결에 대한 상고이유로 할 수 있다.
4.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가 선고된 사건에 있어서
중대한 사실의 오인이 있어 판결에 영향을 미친 때
또는 형의 양정이 심히 부당하다고 인정할 현저한 사유가 있는 때
아주 예외적으로 10년 이상의 중형이 나온 경우에만 양형을 이유로 상고할 수 있습니다. 형이 너무 무거우니 다시 한 번 살펴봐달라고 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놓은 것이지요. 이 조항은 보통 피고인의 억울함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항이지만, 검찰은 반대로 해석한 겁니다. "형을 줄여달라"가 아니라 "형을 늘려달라"고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 사건의 쟁점은 처음부터 '오원춘의 죄질이 얼마나 나쁘냐'가 아니라, '형사소송법 383조 4호가 검찰에게도 적용되나냐'였던 겁니다. 결론은 안된다는 것이었고요.
형사소송법 383조 4호가 만들어진 이유는(입법취지는)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은 경우, 혹시라도 억울할 지 모를 피고인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그래서 대법원은 1960년 이후 줄곳 이 조항을 근거로 한 검찰의 상고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이 그렇게 해석해서 적용해 온 것을 '판례'라고 부르지요. 부산 여중생 살해범 김길태가 2심에서 무기징역형으로 감형 됐을 때도, 검찰은 같은 조항을 근거로 상고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결과는 어느정도 예상됐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상고한 이유는 국민의 법감정 때문이었을 겁니다. 알려진대로 오원춘의 범행 수법이 너무나 잔혹했으니까요.
재판이 끝났습니다. 허탈하게요. 100석을 꽉채웠던 좌석은 오원춘 사건을 판결할 즈음엔 20명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유가족 3명과 기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법정을 나서는 유가족들을 만났습니다. 무슨 질문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질문하는 사람들도, 대답하는 유가족도 답답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래도 유가족 중 한 분이 차분히 대답을 해주셔서 20-30분간 질문과 대화가 오갔습니다. 대법원 앞 뜰에 흩날리는 눈발이 꽤나 을씨년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기자들과 문답을 한 유가족은 피해자의 동생 분이었습니다. 한숨도 못 자고 나왔다고 하더군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고. 괜찮은 척 하면서 살고 있다고.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기다렸는데 이런 결과가 나와서 허탈하고 실망스럽고 속상하다고 했습니다. 나쁜 놈에게 꼭 죄값을 치르게 하겠다고 누나 영정에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하게 돼 누나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말도 했습니다. 듣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재판을 기다리면서 가장 속상한 게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너무 성의가 없는 것이 화가 난다고 답했습니다. 재판 일정을 어제 기자들에게 전해들었다면서.(재판을 앞두고 일정을 체크하는 기자들이 전화를 한 모양입니다) 수사 단계에서도, 재판 단계에서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특히나 경찰의 진심 어린 사과가 없었던 게 가장 분하다고 했습니다. 경찰 간부가 방문을 하긴 했지만, 유가족 분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건 신고 접수를 담당했던 분들의 눈물 어린 사죄가 아니었을까요.
30분 가까운 인터뷰가 끝났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유가족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수면제가 아니면 잠을 못 주무신다는 부모님을 모신 집으로, 그렇게 잔인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힘들까 싶었습니다. 상처를 견디고 아픔이 기억으로 무뎌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던 형사 재판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피해 유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민사소송이 남아있긴 합니다만, 재판에서 이긴다 한들 그것이 그렇게 큰 위안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민사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또 얼마나 많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될까요. 진심어린 위로와 사과가 없는 것이 가장 속상하다는 유가족의 말이 가슴에 박혔습니다. 제 삶의 방식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한들 위로가 되겠습니까만. 그래도 유가족 분들이 힘을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과 피해자 가족의 위로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