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 전투경찰순경 20여명의 입대 순서, 사무실과 관내 지구대 등 40여곳의 전화번호, 경찰서 직원 50여명의 이름과 계급, 차량번호까지….
지난 2002년 입대해 육군훈련소에서 6주간 훈련을 받고 경찰서에 배치받은 A씨가 한 주 만에 좔좔 외워야했던 암기사항이다.
당시 스물 한 살이던 A씨는 경찰서 정문에 서서 하루 6시간 근무하고도 제대로 쉴 틈이 없었다.
선임 대원들의 이불 정리, 슬리퍼 정돈뿐만 아니라 빨래, 구두 광내기, 라면 끓이기, 설거지 등을 대신하며 잡무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암기사항을 주어진 기간에 다 습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심한 욕설을 듣고 얻어맞았다.
행동이 굼뜨다고 수차례 가혹행위를 당하기도 했다.
전입한지 불과 보름이 지나기도 전에 A씨는 활기를 잃고 말았다.
내무실에선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고 다른 대원들에게 "네가 봐도 내가 좀 이상하냐"고 묻기 일쑤였다.
자대배치 직전 머무른 훈련소에서 `긍정적인 생활태도로 동기들과 잘 어울린다'고 평가받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상관에 정신과 상담을 요청한 A씨는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인근 파출소로 전출됐다가 엿새 후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씨 어머니는 국가유공자 등록을 신청했으나 국가보훈처 인천보훈지청이 `자유의지에 따른 자살이었다'며 순직을 인정하지 않자 소송을 냈다.
서울고법 행정11부(김의환 부장판사)는 A씨 어머니가 인천보훈지청장을 상대로 낸 국가유공자 비해당결정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깨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17일 밝혔다.
재판부는 "A씨는 군입대 전까지 정신질환을 앓은 적이 없고,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한 뒤부터 정신적으로 이상을 겪기 시작했다"며 "A씨의 사망은 군 복무와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본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사망이 자살이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자유의지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유공자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