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 전문의는 몇 년 전까지 성추행 범죄자들을 상담하고 교육하는 일을 담당했었다. 정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이 과정을 이수하면 성추행 범죄자들의 신상이 공개되는 게 면제됐다. 때문에 거의 모든 성추행자가 참여했다.
그런데, 성추행자의 대답은 천편일률적이란다. “술을 많이 먹은 상태여서 기억이 나질 않지만, 만약 내가 그랬다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는 것이다. 꼭 누군가가 죄를 적게 받기 위한 모범답안을 주고 외우게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단다. 이 프로그램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회의가 들었던 기간이라고 했다. 그들을 환자로서 상담해주는 것이야 의사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일로 그들의 죄가 감면되는 건 꺼림직했다고 했다.
2009년 조두순이라는 성폭력 범죄자가 최근 12년형을 선고 받았다. ‘술에 취해 심신이 미약한 상태였다’는 걸 법원이 인정해 국민의 법 감정보다 약한 벌이 내려졌다. 하지만, 성폭행 피해자는 범죄자가 술에 취해 심신이 미약했었다고 해서 받는 상처가 얕아지지 않는다. '조두순이 60년 동안 감옥에서 벌레와 살았으면 한다.'고 했던 피해아동은 지금도 아파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성폭행을 당한 사람의 절반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겪고, 분리 불안 장애와 대인 기피증, 그리고 약물 중독에 빠진다. 그리고 그 정신적 후유증은 30년 이상 지속되기도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어렸을 때 성폭력을 당한 사람은 성인이 된 뒤 또다시 성폭행을 당할 위험도가 일반인보다 최고 11배나 높다는 것이다. 성폭행 아동 5천 여명을 대상으로 한 17개의 연구 보고서를 미국 마이애미 의과대학이 분석한 결과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간관계 자체를 꺼리게 되면서, 성인이 된 뒤에도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상황판단능력과 위기 대처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이미 생겼던 일이기 때문에 자기한테 또 있어도 되는 일처럼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무력감도 성폭력 위기를 피하는 걸 방해한다.
최근 또 끔찍한 성폭행 사건에 온 국민이 아팠다. 충격이었고, 두려웠고, 분노했다. 성폭행 관련 뉴스가 2주 넘게 방송과 신문의 앞자리에 배치됐고, 그런 뉴스와 신문을 보고 있노라면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이 슬프게 느껴졌다. 이런 사회의 반응이 감정적이며 지나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범죄자의 화학적 거세뿐만 아니라 물리적 거세까지 거론하는 정치인도 있었다. 맞고 틀리고를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 사회의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용의자는 역시 “PC방에 간 것도 기억이 안 날 만큼 초저녁부터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는 진술을 담당 경찰관에게 했다.
조두순 피해자 아버지를 어렵게 만났다. 그는 이번 사건을 접하고 나서 3년 전 상황이 떠올라 이틀 동안 잠을 못 잤다고 했다. 피해자인 딸도 마찬가지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를 만나고서 성폭력 사건의 범죄자를 어떻게 처벌하느냐의 문제보다 피해를 받은 아이와 가족을 어떻게 잘 보살펴야 하는지의 논의가 더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