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마다 우리 나라를 들썩거리게 하는 스포츠가 있다. 축구다. 공 하나를 놓고 22명의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드라마가 온 국민을 울고 웃게 만든다. 축구가 공을 골대 안에 집어넣는 단순한 경기 같지만 나름 까다로운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골키퍼는 공을 가지고 6초 이상 허비해서는 안 되며 수비수가 없는 상대편 진영에 공보다 앞서 들어가서도 안 된다. 물론 상대편을 차거나 넘어뜨려서도 안 되고 골키퍼 이외에는 공을 손으로 잡아서도 안 된다. 이 밖에도 현대 축구에는 복잡한 규칙들이 정말 많다.
◈ 중세 영국 축구, 규칙은 단 '하나'
하지만 원래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중세 영국 축구의 규칙은 오직 하나, 양측이 미리 합의한 지점에 먼저 공을 옮기는 것이었다. 선수 숫자도 딱히 정해진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 전체가 한 팀이었다. 마을 구성원 전체가 선수였던 셈이다.
경기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치열했다. 아니 난폭했다. 발차기와 주먹질은 물론 이로 물 수도 있었고 심지어 눈을 찌르기도 했다. 종종 몰래 무기가 동원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이 '경기'지 '전쟁'이었다.
아침에 수백 명이 뒤엉켜 시작된 경기는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됐다. 경기가 끝나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잔혹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축구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이긴 쪽은 피의 대가였던 만큼 값진 승리를 자축했고 패한 쪽은 무조건 복수를 꿈꾸며 다음 경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사상자가 속출하자 1331년 에드워드 3세가 축구를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는가 하면 엘리자베스 1세는 축구를 범죄로 간주해 선수들을 일주일 동안 감옥에 가두고 교회에서 고해성사를 하도록 시키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우리나라 일부 군 부대에서도 축구를 금지한 적이 있다. 군에서 전투 체육 시간에 가장 많이 하는 운동이 축구인데 '전투'라는 말이 붙어서인지 격렬하기가 '민간' 축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렇다보니 군 의무실로 실려오는 부상병들 가운데 상당수는 축구하다 다친 병사들이었고 전투력 손실 우려까지 나오자 일부 군 지휘관들이 '축구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 전쟁을 스포츠로 만든 건 '규칙'
그렇다면 현대 축구와 같은 경기 규칙이 생긴 건 언제일까?
축구가 현대 스포츠로서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1800년대에 들어서다. 당시 영국에서 축구는 무질서한 형태로 치러졌기 때문에 각 그룹들은 통일된 경기규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1863년 10월 축구 그룹의 대표자들이 런던에 모여 논의를 시작해 마침내 그 해 12월 협회가 규칙을 통일하고 공인된 규약과 경기규칙을 발행할 것을 결의했다. 현대 축구의 탄생이었다.
결국 전쟁 같았던 축구 경기를 스포츠로 승화시킨 건 통일된 규칙이었다.
◈ 당내 경선, 소리없는 전쟁
정치판도 종종 전쟁에 비유된다. 정치판 역시 규칙은 단 하나. 정권 획득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중세 축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피만 안 튀었다 뿐이지 말로 벌이는 공방과 음모, 술수가 웬만한 전쟁터 저리 가라 할 정도다.
당내 경선도 마찬가지다. 다른 정당과 싸울 때는 동지지만 내부 다툼에서는 양보가 없다. 원래 집안 싸움이 더 무서운 법이다. 가족끼리 싸워서 틀어지면 생면부지 남만도 못한 게 현실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 재벌가의 재산 다툼이 이를 잘 보여준다.
어쨌든 연말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들이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 준비에 한창이다. 지도부 구성을 먼저 마친 새누리당에선 연일 이 경선 규칙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당내 유력주자인 박근혜 전 위원장이 아직 출마 선언을 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비박계 주자들은 완전국민경선제 도입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핵심은 누가 경선 규칙을 정하느냐이다.
◈ 규칙을 정하는 건, 선수? 심판?
김문수, 이재오, 정몽준 등 비박계 주자들은 경선에서 선수로 뛸 주자들이 경선 규칙을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당시 이명박-박근혜 두 캠프의 대리인들이 나서 경선 규칙을 협의했던 것을 전례로 든다.
하지만 박근혜 전 위원장 쪽의 생각은 다르다. 이미 2007년 경선을 국민적 축제로 승화시켰던 기존 규칙이 있는데 이제와서 다른 규칙을 만들자고 운운하는 건 군소 주자들의 꼼수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박근혜 전 위원장 본인도 지난 4월 "선수가 경기 규칙을 보고 거기에 맞춰서 경기를 하는 거지, 매번 선수에게 규칙을 맞춰서 하는 거는 말이 안 된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황우여 대표가 논란에 가세했다. 황 대표는 경선 규칙은 최고위원회에서 정할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경선 관리 책임을 맡은 지도부, 즉 심판이 경기 규칙을 정하겠다고 나선 셈이다.
◈ 규칙의 전제 조건은 '승복'
현재 새누리당 지도부는 친박계가 장악했다는 데 이견이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황우여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가 비박계 주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엄정 중립을 지킬 수 있는 경선 규칙을 만들어내지 못하란 법은 없다. 실제로 황우여 대표가 주자들과 연쇄회동을 갖고 의견 수렴에 나선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하지만 특정 계파가 주도하는 지도부에서 경선 규칙을 만든다면 아무리 엄정 중립을 지킨다해도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다. 특히 완전국민경선제 도입이라는 경선규칙 문제가 제기되자 단 한 명뿐인 비박계 최고위원을 친박계 최고위원 3명이 공박했던 현 상황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또 설사 지도부가 엄정 중립을 지키는 것을 넘어 비주류인 타 계파 주자들에게 통 큰 양보를 한다고 해도 결과를 낙관하기는 쉽지 않다. 특정 계파가 주도하는 지도부에서 경선 규칙을 만들었다는 그 자체만 갖고도 타 계파에서 분란의 빌미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용이 중립적인 것 만큼이나 그 형식이 중립적인 것도 중요하다.
지도부든 대리인이든 누가 경선 규칙을 정한다 해도 문구 하나에 따라 유불리가 갈리는 경선 규칙의 성격상 모든 주자를 만족시키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최소한의 공감대는 이끌어내야 한다. 결과가 나왔을 때 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경기 규칙은 선수들이 승복할 때 의미가 있다.
성공적인 경선 관리를 최우선 과제로 부여받은 당 지도부인 만큼 어떤 방식으로 경선 규칙을 정할지는 지도부의 선택에 달렸다. 전당대회를 통해 뽑힌 지도부인 만큼 당연한 권한일지 모른다. 다만 우리나라 원내 1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이 서로 피 튀기게 싸우고 패한 쪽이 복수의 칼을 갈게 만드는 중세식 축구판처럼 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