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열린 유럽연합(EC) 정상회의는 앞으로 이 행사가 더 이상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독무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24일 `올랑드가 메르켈의 쇼를 훔쳤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에게로 옮겨간 스포트라이트에서 소외된 메르켈의 달라진 위상을 꼬집은 것이다.
정상회의 직후 유럽위원회 건물내 프랑스 기자회견장은 운집한 기자들로 빈 자리가 없었고 공기는 답답했다.
같은 시각 옆방인 메르켈의 기자회견장에는 불과 몇 줄의 좌석과 일부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그나마 좌석은 절반이 비어있었고 메르켈은 두 개의 질문에 짧게 대답하고 5분 만에 기자회견장을 나갔다.
유럽정상회담에 앞서 독일과 프랑스 정상이 사전에 만나지 않은 것은 이례적이었다. 메르켈이 유럽정상회담을 주도하지 못한 것도 몇 년 만에 처음이라고 슈피겔은 지적했다.
올랑드는 이날 정상회의에서 `성장' 관련 각종 요구와 주장을 쏟아냈다. 반면 메르켈은 `안된다'는 부정적인 대답으로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올랑드는 "모든 국가들이 경제를 성장시키고 낮은 금리에 자본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유로본드 도입을 촉구하며 메르켈을 몰아세웠다.
메르켈은 유로본드 도입은 엄격한 재정 운용을 회피하게 한다는 점, 유럽통합조약인 리스본조약의 직접구제금융 금지 조항을 위배한다는 점 등을 이유로 맞섰다.
독일로서 유로본드 도입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구상이다.
자국의 국가 신용등급 하락과 이로 인한 자금 조달 비용 상승을 독일 국민이 용인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올랑드도 독일이 유로본드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행동한다는 게 독일 언론의 관측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유로본드를 주창하고 나선 것은 전임자인 니콜라 사르코지와 메르켈의 밀월관계인 `메르코지' 시대는 과거이고 미래에는 프랑스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겠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분석이다.
적어도 내달 17일 프랑스의 총선 때까지는 프랑스가 독일과 거리를 둘 것이라는 전망이다.
올랑드가 성장과 긴축 완화의 깃발을 내걸자 이탈리아와 스페인 총리가 반겼고, 그동안 재정건전화 정책을 더 중시해왔던 오스트리아와 벨기에까지 가담했다.
유로본드 반대 입장을 유지하며 메르켈 편에 서있는 것은 네덜란드, 핀란드, 스웨덴 정도다.
메르켈은 국제 사회의 압력이 거세지더라도 유로본드 도입 불가 등 긴축 노선을 고수할 전망이다.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빚더미에 올라 앉은 국가들에 `퍼주기식 지원'은 안된다는 것이 압도적인 국민 여론이기 때문이다.
메르켈이 신 재정협약의 의회 승인을 위해 협조를 얻어야 하는 사회민주당(SPD)도 올랑드 대통령의 성장론에 보조를 맞추고 있지만, 유로본드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밝혔다.
지그마르 가브리엘 사민당 당수는 24일 메르켈과의 회담을 앞두고 공영 ARD 방송과 인터뷰에서 "유로본드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토마스 오퍼만 사민당 원내 의장은 이날 일간지 디 벨트에 "우리는 제어할 수 없는 부채 탕감에 반대하다. 유로본드는 결코 허용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메르켈의 유로존 정책에 대해 독일 내에서도 비난의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긴축 정책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 독일이 주도권을 상실하고 고립화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다.
슈피겔은 메르켈을 국가 신용등급에 빗대어 `트리플 A 인지도'를 잃고있다고 우려했다.
메르켈이 올랑드에게 끌려가지 않고 주도권을 되찾으려면 긴축의 바탕위에서 현실 가능한 성장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독일 언론과 정치권 등의 주문이다.
(베를린=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