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봉은사의 정문에 해당하는 진여문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오랜 기간 문화재전문기자로 활약한 서동철(52) 씨가 펴낸 '오래된 지금'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 속에 숨어 있는 42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쳐보인다.
'서동철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봉은사 진여문에 있는 사천왕상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사천왕상 서방광목천의 사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대로 헤라클레스가 네메아 계곡에서 30일 동안 밤낮으로 목 졸라 죽인 뒤 그 가죽을 쓰고 다녔다는 네메아의 사자라는 것이다.
지금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인 간다라는 서기전 327년 그리스 고대왕국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됐다. 이후 이곳에 자리 잡고 살던 그리스인들의 문화가 1세기 쿠샨왕조 이후 불교문화와 융합한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가 부처의 호위무사로 편입됐다.
저자는 그리스 무사 풍의 헤라클레스가 금강역사로 변화하는 과정은 세계 각 박물관에 남아있는 간다라 조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불교에 편입된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 헤라클레스는 흔히 서역으로 불리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다. 한반도에서 헤라클레스는 682년 세워진 경주 감은사 서탑 사리함의 사천왕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전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삼국시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백제의 수도는 철저하게 파괴됐는데 정림사터오층석탑이 지금껏 제자리를 지킨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땅을 짓밟고서 이 탑에 평제비명(平濟碑銘)이라는 낙서를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이 낙서가 새겨지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정림사탑이 '소정방기념탑'이 되지 않았으면 이 탑도 사라져버렸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정림사탑은 통일신라시대 내내 백제 고토에 사는 주민들에게 '백제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했기에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조선시대 불교행사에 사용되던 대형 불화인 괘불의 크기가 높이 15m에 이를 정도로 커진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목숨을 잃은 영혼이 많아 좁은 법당에서 법회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생각처럼. 400쪽. 2만3천원.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