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국회 본청 앞과 민원인 출입구, 의원회관 안내실 등 곳곳에서 한바탕 활극이 벌어졌다. 경남 남해·하동 지역에서 올라온 지역구 주민 60여 명이 선거구 통폐합 움직임에 항의하며 삭발식 등 항의 시위를 하려다 이를 막는 국회 방호원들과 충돌한 것이다. 지역 주민들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국회 본청을 빠져나오다 소형 현수막을 놓고 방호원들과 실랑이를 벌인 데 이어 국회 본청 앞에서는 삭발식을 강행하려다 격한 몸싸움까지 벌였다. 결국 경찰 국회경비대까지 출동해 경고방송을 하고 방호원들이 강제 해산에 나서면서 소란은 잦아드는 듯 했다.
하지만 선거구 획정을 논의하는 국회 정치개혁특위의 여야 간사를 면담하겠다며 찾아간 국회 의원회관에서 더 큰 소동이 빚어졌다. "왜 면담이 안 되느냐"고 항의하던 도중에 일부 주민들이 안내 창구에 드러눕는가 하면 고함을 지르고 몸싸움을 하면서 안내실은 아수라장이 됐다. 역시나 경찰과 방호원들이 동원돼 주민들을 강제로 퇴거시키는 소란이 뒤따랐다. 그 와중에 일부 주민들은 의원회관 안까지 들어가 야당 간사의 의원실을 점거했다 끌려나가기도 했다.
◈ 선거구 획정…그 치열한 밥그릇 싸움
여야는 현재 강원도 원주와 경기도 파주를 각각 2개 선거구로 쪼개고 세종시 선거구를 신설하는 등 3개 선거구를 증설하는데 합의했다. 문제는 늘어난 3개를 어디서 줄일 것인가이다. 이번 소동도 이 문제와 무관치 않다. 새누리당은 영·호남을 같은 수로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영·호남 1석씩 2석과 수도권에서 1석을 줄이자는 최종안을 제시한 상태다. 민주통합당은 영남 2석, 호남 1석을 줄이는 게 맞다는 입장이다.
양측 모두 논리는 있다. 새누리당은 인구대비 의원 수를 따져보면 영남보다 호남이 더 많다며 사실 줄인다면 영남보다 호남 의석수를 더 줄여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감안해 동수로 줄이자는 입장이다. 미국도 하원 의석수를 정할 때 전체 인구수를 기준으로 의석수를 배분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민주통합당은 인구가 적은 순서대로 선거구를 통폐합하면 3석 모두 영남에서 줄여야 하지만 역시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감안해 호남에서도 1석을 양보하겠다고 말한다. 또 영남 의석수가 호남에 비해 2배에 달하는 점도 고려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듣고 보면 다들 그럴 듯한 이유와 명분이 있지만 결국 각 당에게 유리한 선거구는 못 줄이겠다는 소리다. 선거구 획정 늦어지는 건 그 다음 문제다. 하지만 양측 모두 근거로 내세우는 게 있다. 바로 인구수다.
◈ 선거구 통폐합 기준은 오직 '인구수'?
선거구는 선거를 치르는 지역, 즉 공직자를 선출하는 지역과 유권자를 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구 조정은 정치인에게 당락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다. 예를 들어 선거구가 갑·을로 나뉘는 지역의 경우 그 경계를 어떻게 획정하느냐에 따라 후보자들의 유불리가 극명하게 갈릴 수 있다. 쉽게 말해 보수정당 후보는 보수층이 많이 사는 지역을, 진보정당 후보는 진보층이 많이 사는 지역을 더 많이 포함시켜야 선거에서 유리해진다.
정치인들의 게리멘더링(gerrymandering)을 막고 공정한 선거구 획정을 하기 위해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은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선거구획정위원회에서 선거구획정안을 작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작성된 안은 국회의장에게 제출되며 국회는 이 획정안을 존중해서 선거구를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존중'인 관계로 강제성이 없고 때문에 획정위 안은 종종 무시되게 마련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19대 국회를 앞두고 선거구획정위는 현재 한 선거구인 경기도 여주·이천, 수원 권선, 용인 수지, 용인 기흥, 파주 그리고 강원도 원주를 두 선거구로 나누고 현행 두 개 선거구로 나뉘어있는 부산 해운대·기장과 충남 천안을 각각 세 개로 추가 분할하는 등 모두 8곳을 늘리도록 했다. 대신 현재 3개 선거구인 서울 노원과, 대구 달서를 2개 선거구로 통합하고, 2개 선거구로 나뉘어 있는 서울 성동과 부산 남구, 전남 여수를 한 개로 통합해 모두 5곳은 합치도록 했다.
획정위는 이렇게 지역구 의석을 3석을 늘리는 대신 비례대표 3석을 줄여 전체 국회의원 정수를 299석으로 유지하도록 했다. 쟁점이 됐던 행정도시 세종시는 아직 인구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해 별도 선거구로 독립시키지 않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획정위는 한 선거구에 최대 31만여 명, 최소 10만 3천여 명의 범위 안에서 선거구를 조정했다. 전 지역 선거구의 인구편차가 전국 선거구 평균인구 (20만 6천여 명)의 ±50% 이내가 되도록 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해 정한 것이다.
하지만 여야가 통폐합을 고려 중인 경남 남해·하동과 전남 담양·곡성·구례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곳이다. 헌법재판소가 정한 인구 하한선에 걸리지도 않고 선거구획정위가 정한 통폐합 대상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지역 주민들이 격하게 반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표의 등가성이라는 함정…하지만 결국 만만한 게 농어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야가 이들 두 지역을 통폐합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뭘까? 경남 남해·하동은 전국 선거구 가운데 가장 인구가 적은 지역이라는 게 이유다. 전남 담양·곡성·구례는 호남에서 인구가 가장 적다는 게 이유다. 인구 수, 즉 표의 등가성을 문제 삼은 것이다.
얼핏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경남 남해·하동은 전국 선거구 가운데 인구가 가장 적어 통폐합한다고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제시한 기준을 충족한다는 점에서 인구만 갖고 지역구를 없애는 것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인구 외 다른 기준이 없으면 모르되 그게 아닌 상황에서 인구 수만 갖고 통폐합을 결정하는 건 근거가 약하다.
특히 전남 담양·곡성·구례는 인구 수로 따져도 그 곳보다 적은 지역이 세 군데나 더 있는데 통폐합 대상에 포함됐다. 선거구별 인구 수로 평가한다면 영남에서만 3석을 줄여야 할 상황이니 호남도 한 곳 끼워 넣으면서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특히 이곳 현역 의원인 김효석 의원이 수도권 출마를 선언하면서 지켜줄 사람이 없어졌다는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선거구획정위안의 통폐합 대상에서 이들 지역이 빠진 걸 보면 단순한 인구 수 외에 다른 고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획정위는 회의 과정에서 "표의 등가성만을 강조할 경우 농어촌 지역과 지방중소도시의 지역대표성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인구기준을 차등 적용하는 등 제도적 보완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즉, 농어촌 지역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는 얘기다.
◈ "도시 의원 ≠ 농어촌 의원"
여야가 통폐합 대상으로 두 지역을 고려하게 된 데는 나름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새누리당은 대상이 여러 곳이어서 형평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지방도시들보다 '전국 인구 수 최저'로 근거가 딱 떨어지는 경남 남해·하동이 속 편할 수 있다. 민주통합당도 현역 의원들이 있는 곳보다는, 지역구 의원이 떠난 지역을 없애는 것이 반발이 적으니 쉽게 손이 가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는 전언이다.
문제는 선거구를 잃는 지역 주민들이다. 물론 선거구가 통폐합된다고 해서 자기 지역 국회의원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러 지역이 한 선거구에 묶일 경우 해당 지역 의원은 가장 큰 행정단위, 예를 들어 인근에서 가장 큰 군(郡)이나 시(市) 출신의 인사가 당선되기 마련이다. 그 만큼 그 지역 사정을 대변해줄 여지는 줄어들게 된다.
국회가 난장판이 됐던 지난 17일, 한 지역주민이 취재진에게 던진 말이 기억난다. "도시 지역 시민들은 자기 지역 국회의원 이름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 아닙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하지만 시골은 달라요. 기댈 수 있는 언덕이고 우리 대표자란 말입니다."
농어촌 지원대책에도 불구하고 잇따라 체결되는 FTA로 농어촌 사정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이다. 주민들로선 그들의 목소리를 대표할 사람이 더 필요할 수밖에 없다. 표의 등가성만 내세워 그들의 요구를 마냥 무지르기가 힘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