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주요 정치 지도자들이 '역사적 합의'라고 자평하는 지난주 정상회담 결과가 금융시장에선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주 금요일 유로존(유로화 사용국) 17개 회원국과 영국 등 일부를 제외한 EU 국가들이 재정통합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신(新) 재정협약에 대거 참여키로 했다는 소식에 유럽과 미국 등 각국 증시는 큰 폭의 상승세로 마감했다.
그러나 투자 관련 기관들이 주말 동안 합의 내용을 자세하게 검토한 뒤에 처음 금융시장이 개장한 12일 주요 증시들이 폭락세를 보이고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유로존 위험국가 채권 수익률(금리)은 다시 뛰고 있다.
이는 시장이 기대했던 수준의 위기진화 대책이 정상회담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재정협약은 유로존 위기의 요인 중 하나인 과도한 국가부채와 재정적자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장치이자 유럽의 통합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기는 하지만 중장기 대책일 뿐이다.
그마저도 각국 의회 비준과 국민투표라는 '암초'에 걸려 난항이 예상되고 있다.
이보다 더 큰 시장의 관심사는 악화 일로에 있는 유로존 채무ㆍ금융위기를 해결할 단기 처방이었다.
특히 구제금융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리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안정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규모의 '실탄'을 EU가 제공하느냐가 금융시장 불안 해소의 관건이라고 시장 관계자들은 지적해 왔다.
금융시장 뿐만 아니라 EU 내의 일부 기관 보고서도 위기진화자금이 2조 유로 이상 돼야 한다고 추계한 바 있다.
반면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진화자금 규모는 EFSF(4천400억 유로)와 ESM(5천억 유로)의 기금에 IMF 지원금(2천억 유로)을 합해 1조1천400억 유로에 불과하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시장 개입 확대 공식화와 유로채권 발행은 불발됐다. 또 ECB가 지난주 시장에서 사들인 유로존 위험국 국채 규모는 200억유로 어치에 미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투자자들의 실망감이 커졌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12일 "EU 정상회의 합의는 새로운 게 거의 없어 신용등급 하향조정 위험을 줄이기에는 역부족"이라며 내년 1분기에 EU 국가들의 신용등급 하향조정 여부를 검토한다는 계획에 변동이 없다고 밝힘으로써 시장의 분위기를 악화시켰다.
스탠다드 & 푸어스(S&P) 역시 EU 정상회의 직전인 지난 8일 EU의 신용등급 전망이 '부정적'이고 'AAA'인 EU의 신용등급이 강등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EU 정상회의 뒤에 다시 평가 결과를 내놓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ECB의 시장 개입 확대 등 새로운 조치를 EU가 내놓지 않을 경우 금융시장의 불안이 계속 증폭될 우려가 있다고 시장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하지만 곧 크리스마스 휴가와 연말연시가 시작될 것이어서 EU와 유로존 국가들의 회담이 가까운 시일 내엔 열리기 어려운 실정이다.
내년 3월 EU 정상회담 이전에 재무장관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할 수는 있으나 현재로선 이들 역시 뾰족한 대책을 내놓을 수 없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따라서 ECB가 스스로 소방수 역할을 해줄 것을 바라는 시장의 기대감과 유로존 안팎의 압력이 이번 연말 연시에 어느 때 보다 커질 것으로 보인다.
(브뤼셀=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