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엔화가 연일 사상 최고치로 치솟고 있다. 25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화 가치가 사상 최고치인 장중 달러당 75.73엔까지 상승했다.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엔화는 유럽 재정위기, 미국 경제 침체 등 악재가 등장할 때마다 추가로 강세를 띠는 모양새다. 현재 유럽 재정위기가 해법을 모색해나가고 있는 과정인데도, 엔화 초강세 추세는 누그러지지 않고 있다. 미국 정부가 달러를 더 풀어서 추가 경기부양에 나설 것으로 전망되자 달러값은 약세, 곧 엔화는 더 강세를 나타냈다.
엔화 강세로 가장 곤혹스러워진 건 일본 수출 기업. 최근 발표된 일본의 4~9월 무역수지가 1조6천억 엔 넘는 적자를 기록한 것도 엔화 강세로 인해 일본 기업의 수출경쟁력이 속수무책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통상 일본 수출기업들이 손해보지 않을 정도가 되려면 달러당 85~87엔 사이를 얘기하는데 현재 이것보다 10엔이나 차이가 나니까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수출기업들은 '이 환율 수준으로는 일본 내에서 생산할 수 없다'며 공장을 외국으로 옮겨가거나 초강세를 띤 엔화를 이용해 해외기업을 상대적으로 싸게 사들이는 M&A의 기회로 활용하는 모습이 감지되고 있다.
당연히 일본 정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지금까지 이미 막대한 엔화를 풀고 달러를 사들여왔지만 그때뿐, 시장개입 효과가 허무한 수준이다. 일본은행은 금융시장의 불안을 차단하기 위해 국채와 회사채 등의 매입기금을 증액하는 것을 축으로 추가적인 금융완화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현재 엔고 수준이 수출기업 이익 악화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규정하고 "과도한 투기적 움직임에 대해 필요한 경우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구두 개입도 병행하고 있다.
그럼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보자.
'수퍼 엔고' 현상, 일단 일본 제품과 세계시장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국내 수출업체에는 가격경쟁력에서 상당한 잇점이 있기 때문에 유리한 소식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철강업계도 그렇고 조선업계도 엔고로 인해 수주 경쟁력에서 앞서고 있고, 정유사도 엔화가치 상승에 따라 대일수출이 크게 늘었다. 내수업종 가운데서는 엔화를 들고 다른 나라에 나오면 부자가 되는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로 몰리면서 호텔, 관광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경제현상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을 터. 우리나라 제조업체의 일본 부품의존도가 상당히 높다는 게 문제다. 대일 무역불균형의 주범은 바로 부품경쟁력에서 우리와 일본 간에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엔고로 일본에서 부품 소재를 수입하는 기업들은 수입비용 증가로 막대한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고 울상을 짓고 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일본에서 수입한 부품 및 소재의 누적 금액은 517억 달러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8.9% 증가했다. 플라스틱 제품이 가장 많고, 반도체 제조용 장비, 철, 비합금강열연강판, 은 등이 주된 품목인데, 엔고가 더 심해진 10월 이후 통계는 더 큰 폭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이대로 엔고현상이 장기화될 경우 올해 적자를 면치 못할 것이라며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엔화 대출'을 받은 중소기업들이 많다는 점도 문제다. 금리가 낮아서 엔화대출을 시설, 운전자금 용도로 많이 받았는데, 이자와 원금을 모두 엔화로 돌려줘야 하기 때문에 최근 엔고현상이 가파르게 나타날수록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갚아야 할 돈과 이자는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다.
즉, 예전에는 '엔고' 하면 우리나라에는 '긍정적인 반사이익'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좀더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수출기업들도 일본 기업에 비해 제품가격 경쟁력을 확보하지만 부품 수입 때문에 제조 원가가 오르게 되면 단기적 영향에 그칠 것이다. 또 일본 기업들이 이미 엔고를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기업을 옮기거나 기업을 사들이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어서 오히려 예전보다 해외에서 더 경쟁이 치열해질 가능성도 있다.
일본의 엔화 강세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미국 유럽의 경기침체 정도를 감안하면, 달러가 더 흔해질 수 밖에 없다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엔고 현상이 구조적으로 고착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일본 기업과 정부도 그런 엔고 현상을 예측, 분석하지 않았을 리 만무하고, 그 속에서도 무역흑자를 일구어온 저력이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결국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활용할 것은 활용하고, 부품의 대일무역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등 대응책도 동시에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