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국회의원 보좌관과 식사를 했습니다. 기자 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알던 친구였기 때문에 가볍게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둘 다 술을 싫어해서 만나면 주로 티타임을 갖거든요)
기획취재팀원인 저는 이른바 '맨땅에 헤딩하는' 고충을 털어놓았고 보좌관 친구는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어려움을 주로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국회 쓰레기통 보면 가관이야. 다 버려. 그런 것 좀 취재해 봐."
그냥 우스개 소리 쯤 여기다가 생각해보니 이야기가 될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정말로 뜨악할만한 문서를 쓰레기장에서 찾느냐 못 찾느냐인데 그러려면 그런 문건이 나올 때까지 쓰레기통을 헤집고 다녀야하지요. 꽤나 피곤한 아이템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제가 하는 일이 그런 건데요.
쓰레기가 나오는 과정을 살피기 위해 국회를 찾았습니다.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이 매일 새벽 5시 반부터 작업을 하시더군요. 쓰레기가 집하장에 모이는 시간은 오전 10시 쯤이고요. 며칠간 혼자 의원회관을 찾아가 쓰레기장을 뒤졌습니다. 생각보다 나오는 문서의 양이 꽤 되더군요.
며칠 후, 본격적인 촬영을 위해 VJ와 함게 동선을 짰습니다. 허각보다 노래를 잘하는 VJ 김준호 씨와 함께 사흘간 촬영을 했지요. 준호 씨는 의원회관 내부에서 캠코더로 촬영을 하다가 걸려 쫒겨나기도 했습니다. 꼭두새벽부터 쓰레기장을 촬영하느라 준호 씨가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매일 한 박스씩, 버려진 문서들을 들고 회사로 들어왔습니다. 버려서는 안 되는 문서가 있는지 살펴봤는데... 생각보다 심각하더군요. 청문회에 출석했던 사람들의 모든 신상정보가(개인정보와 재산 내역 등이 전부) 그대로 버려지고 있었습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관련 내용을 국회 사무처에 문의해봤더니, 문서 파쇄와 관련한 규정은 따로 없다고 하더군요. 파쇄 시설도 한참 모자랐고요.(1~2년 내에 파쇄기를 교체할 계획이라고는 합니다만)
촬영을 하는 사흘 동안, 아쉽게도(?) 비밀문서를 줍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보좌관들 얘기로는 대외비나 비문들도 그냥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특히 각종 문서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국정감사 기간에는 더더욱 말이죠.
방송 일정을 좀 늦추고 비문이 나오길 기다려 볼까도 생각했지만, 섹시한(?) 기사를 쓰는 일보다, 파쇄가 잘 되도록 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문제제기를 해서 국감 기간에 파쇄가 잘 이루어지는 편이 멋진 기사 쓰겠다고 비문과 중요문서들이 무방비로 버려지는 걸 보는 것보다는 보도의 본래 목적에 더 부합하겠다는 생각 말이지요.
솔직히, 2주 조금 못되게 아침마다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하는 생각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기사를 써놓고 보니 나름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더 이상 쓰레기 냄새 안 맡아도 되니 좋은 것도 있고요. 하하.
사실관계를 확인해서 편하게 쓰는 기사보다 맨땅에 헤딩하는 기사가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고생스런 기사라도 힘 닿는대로 열심히 쓰겠습니다. 주변에서 이상하다 싶은 게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많이들 제보해 주세요. ^^
yohani@sbs.co.kr / @sbsyohan / 010-3567-2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