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현장 다니면 글감이 쏟아집니다. 그런데도 몸 여기저기 소소한 탈이 나서,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제 좀 나아지니 가장 먼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늘은 발레 ‘지젤’ 얘깁니다. 국립발레단의 '지젤'을 취재했습니다.
'지젤'은 많이 아시다시피 19세기 로맨틱 발레의 걸작으로 불리는 작품입니다. 19세기 낭만주의의 흐름을 타고, 1841년 테오필 고티에의 대본, 장 코랄리, 쥘 페로의 안무로 파리 가르니에 극장에서 초연됐습니다. 당시 시대를 풍미하던 발레리나 카를로타 그리지가 주역을 맡았습니다. 이후 '지젤'이라는 역은 프리마 발레리나들이 가장 탐내는 역 중 하나가 됐습니다.
'지젤'은 '지젤'이라는 이름의 시골 처녀를 주인공으로 한 2막 발레입니다. 지젤이 신분을 숨긴 귀족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에게 약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져 죽는 게 1막의 내용입니다. 2막은 '서양판 처녀귀신'인 '윌리'들이 모여 사는 숲이 무대입니다. 윌리는 지나가는 남자들을 죽을 때까지 춤추게 만드는 방법으로 여성을 배신한 남성들에게 복수를 합니다. 지젤의 무덤을 찾아왔다가 윌리의 포로가 된 알브레히트는 지젤의 사랑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는 내용이 2막에서 펼쳐집니다.
1막의 무대는 지젤이 사는 시골 마을.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시작하지만, 지젤이 알브레히트의배신을 알고 광기에 빠져 괴로워하다 죽는 장면으로 끝나는 극적인 구성이 압권입니다. 2막은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어 로맨틱 튀튀(우산처럼 생긴 짧은 치마 '클래식 튀튀'와는 달리, 폭이 넓고 긴 치마입니다)를 입은 윌리들의 군무가 몽환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납니다.
국립발레단이 '지젤'을 공연하기는 참 오랜만입니다. 제가 본 걸로는 국립발레단이 국립극장 소속이었던 1998년, 예술의전당 상주단체로 옮겨온 이후인 2002년에 한 번 더 공연하고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번 ‘지젤’은 국내 처음 선보이는 파리 오페라발레단 버전입니다. 파리 오페라발레단의 부예술감독 파트리스 바르가 오리지널에 충실하게 안무한 버전이지요. 파트리스 바르는 한국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국립발레단 무용수들을 지도했습니다. 의상과 무대 역시 해외 스태프들이 맡아 공들여 새로 제작했습니다.
이번 '지젤'은 마임이 굉장히 섬세하고 많이 나오더군요. 모든 동작의 의미를 세세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찬찬히 살펴보며 뜻을 짐작해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프레스 콜이 끝나고 들은 이야기입니다, 안무가 파트리스 바르는 ‘지젤’에 표면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설정을 숨겨놨다고 합니다.
지젤이 사랑하는 알브레히트는 이미 공작의 딸인 바틸다와 약혼한 사이입니다. 이 바틸다는 알고 보면 지젤과 배다른 자매지간이라는 설정입니다. 즉 공작은 왕년에 지젤의 어머니와 관계를 맺은 적이 있고, 이 결과 지젤이 태어났다는 것이지요. 출생의 비밀이 흔히 등장하는 '막장 드라마' 같은 설정이지요?
이 설정에 따르면 지젤과 바틸다는 아버지가 같은 자매이면서, 한 남자 알브레히트를 두고 경쟁하는 구도가 됩니다. 지젤 모녀는 2대에 걸쳐 귀족에게 농락당하는 셈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젤의 어머니가 공작을 처음 봤을 때 흠칫 놀라는 것, 그리고 공작 일행이 지젤의 집으로 잠시 쉬러 들어갈 때, 공작이 지젤의 얼굴을 들어올려 유심히 쳐다보는 것 등이 이런 설정을 뒷받침합니다. 사실 저는 이 얘기를 듣기 전에는 공작이 지젤의 턱을 들어올려 유심히 쳐다보는 걸, '얼굴 꽤나 반반하게 생겼군' 하고 탐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짐작했었습니다.
자세한 사정 모르는 관객들은 안무가의 이런 '설정'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용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그런 구도라면 지젤과 바틸다의 처지가 더욱 대조적으로 사무치게 다가올 수 있고, 지젤의 어머니가 지젤을 바라보는 심정이 더욱 절절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연기에 현실감과 깊이를 더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제 프레스 리허설에 이어 어제 개막 공연을 봤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지젤', 참 좋더군요. 저처럼 '지젤'을 기다려 온 관객들이 많았던지, 이번 공연은 말 그대로 '전석매진'을 기록했습니다. 국립발레단 역사상 정기공연 전석매진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매진이라는데도 표 좀 사게 해달라는 관객들이 많아서, 평소에는 오픈하지 않았던 4층 좌석과 시야 장애석까지 모두 싼 가격에 팔았습니다.
전석매진의 요인은 뭘까요? 너무나 당연하지만, 좋은 작품을 골라서 잘 만들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윱니다. 캐스팅 화려합니다. 국립발레단의 스타 무용수들뿐 아니라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도 객원 주역으로 무대에 섭니다. 유명한 프랑스 오페라 발레단 버전을 가져왔고, 무대, 조명, 의상, 모두 공들인 티가 납니다.
적극적인 마케팅도 주효했습니다. 국립발레단은 지난해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같은 인기 작품들을 공연할 때부터 '지젤' 홍보에 나섰습니다. 신작이라 제작비가 많이 들었는데도 오히려 입장료는 가장 비싼 좌석도 10만원을 넘지 않도록 전체적으로 내렸습니다.
아직 '지젤'에 대해 할 말이 많은데, 너무 길어지면 마무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이어 쓰려 합니다. 계속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