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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토크] 베르사이유 궁전은 왜 생겼을까

프랑스 베르사이유특별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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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는 왜 생겼을까…

베르사이유라고 하면 아름다운 궁전과 마리 앙트와네트 정도를 떠올리실 겁니다.  프랑스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궁전인 만큼 얽힌 사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각 나라들은 격변의 시기를 겪습니다. 프랑스에서 베르사이유는 급변하는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던 역사적 장소입니다.

한국에 온 베르사이유의 소장품들을 보면서 얘기를 풀어 가려고 합니다.

베르사이유는 단순히 왕의 사치스러운 궁전이 아닙니다. 지금의 프랑스 지역이 중세봉건시대를 지나 '큰 국가'로 완성되는 시점에서 생겨난 궁전입니다. 봉건제라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작은 지역으로 나뉘어진 땅을 각각의 귀족들이 다스리는 형태입니다. 작은 지역을 다스리는 귀족들의 연합 중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왕입니다. 귀족들은 왕에게서 작위와 영지를 받아 그 땅을 다스리고 큰 전쟁이 생겼을 때 왕을 위해 싸웁니다. 영지의 크기나 중요도에 따라 귀족의 작위가 다릅니다.

봉건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왕도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귀족 중에서 조금 더 큰 귀족 정도라고 볼 수 도 있습니다. 귀족들의 영지는 왕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뭉쳐야 산다'는 말은 국가적인 단위에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들과 경쟁하는데 조금만 영지의 동원력으로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귀족들끼리 뭉치긴 했는데 자기 영지의 이익을 위하다 보니 결속력이 약합니다. 게다가 상업이 발달해야 나라가 부유해 지는데 영지간의 알력이 있으면 상인들의 이동도 쉽지 않습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이 생긴 것은 바로 이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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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14세. 태양왕.

베르사이유 궁전을 화려하기 지어놓고 왕궁무도회 등의 행사가 열리자 귀족들이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영지에만 있다가는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왕과 파티를 즐기면서 친해진 경쟁관계의 귀족들이 자신을 추월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중앙정계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때부터 생긴 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요즘도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회가 있는 서울에서 정치활동을 벌입니다. 이 시대의 귀족들도 자신들의 영지에는 유능한 신하 관료를 남기고 서울인 파리, 그것도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몰려듭니다. 이런 방법으로 귀족들은 자신과 영지의 이익을 왕 앞에서 대변할 수 있었습니다.

귀족부인과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인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혀 있다가는 귀족끼리 결혼해서 뭉치는 강한 영지 앞에서 힘을 쓸 수 가 없습니다. 베르사이유라는 큰 사교장에서 이루어지는 파티는 이들에게 새로운 세력형성의 무대였습니다.

태양왕 루이 14가 처음부터 이런 미래를 예상하고 베르사이유 궁전을 지었을까요? 정확히 알 수 는 없지만 귀족들이 베르사이유로 몰려들면서 왕권이 강화된 것은 분명합니다. 왕 옆에서 파티와 정치를 하다보니 영지에 있을 때보다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듭니다.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앙으로 왔지만 결국은 자기 스스로가 왕의 볼모가 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 영지에 군대가 있지만 자기 스스로가 왕 옆에 있으니 모반을 꾀하기 힘듭니다.

귀족들은 베르사이유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자신의 영지에서 나오는 세금이 예전보다 더 많이 베르사이유로 집중됩니다. 베르사이유에 몰려든 귀족들과 식솔들이 먹고 살려면 굉장한 물자가 필요했습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이 한 창일 때는 방문하는 귀족들이 약 1만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을 접대하기 위한 궁인들, 지금말로 얘기하면 베르사이유 궁전 직원들이 약 3천 명, 키우는 말이 약 6백마리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루이14세가 어렸을 때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때의 경험이 베르사이유 같은 발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짐작해 봅니다. 귀족들과 맞서 싸우기 보다는 화려한 연회를 통해 모이게 된 귀족들과 여러 가지 격식을 만들어나가며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줬습니다. 귀족들은 중앙정계로 진출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 행정적인 부분에서는 멀어지게 됩니다. 자신의 이익이 중요하지  귀찮은 행정업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귀족들은 왕실과 긴밀히 협력하게 되면서 주로 경제적인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왕실재정에 충당되는 세금을 걷어 들이면서 많게는 7할 가까이 자신이 챙겼습니다. 비난은 왕실로 향하게 하면서 귀족들은 점점 부자가 되었습니다.

중앙으로 권력이 모이자 행정업무를 해줄 관료들의 세력도 커졌습니다. 이들은 귀족들이 각자 자신의 영지를 다스릴 때보다 왕에게 권력을 집중시켰습니다. 이들 유능한 관료들은 왕에게 충성도가 높은 신하였습니다.

베르사이유에 있는 왕과 수많은 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도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베르사이유라는 중앙정계를 보호하기 위해 항상 준비된 군대가 형성되고 점차 커집니다. 고등학교때 배웠던 왕권 강화와 중앙상비군, 관료제라는 단어가 이렇게 등장하게 됩니다.

왕을 중심으로 귀족들이 모이고 왕을 떠받들기 시작하자 루이14세는 '짐은 곧 국가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왕권이 신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요. 왕권신수설이란 시험단어도 여기서 등장합니다.

베르사이유는 보통 떠올리듯이 사치스런 연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시대적인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강한 국가가 필요했는데 그 조건에는 강한 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이런 상황을 이용한 왕입니다. 베르사이유로 귀족들을 유혹했고, 귀족들은 스스로 왕의 영향권 안에 들어와야 했습니다.

나중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화려한 베르사이유 시대가 끝났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사실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베르사이유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최신을 자랑하다가도 어느덧 구식에 되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재정 부족으로 제대로 운영하기 어려운 베르사이유를 많은 귀족들이 떠나 있는 상태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미술전시 - 프랑스 국립 베르사이유 특별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배경음악 - '베르사이유' 양방언

영화자료 - '마리 앙트와네트'(2007, 소피아 코폴라 감독)

참고화면 - 베르사이유 공식홍보영상

취재협조 - GNC 미디어, 예술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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