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발찌를 소급 부착한 한 남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과 관련해 쓴 제 글에 상당히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거의 만장일치로 욕설에 가까운 비판이었습니다. 제가 전자발찌 부착을 반대하자는 뜻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지만 많은 분들은 그런 관점에서 비난하셨습니다. '제가 논리적으로 설명을 못했나보다' 반성했습니다.
'데드맨워킹'이라는 영화를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수전 서랜든이 헬렌 수녀로 분했고 숀팬이 살인죄를 저지른 사형수 매튜를 연기했습니다. 영화속 매튜는 데이트 중인 소년과 소녀를 공격해 소년을 처참하게 살해하고 소녀를 강간한 흉악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헬렌은 매튜의 사형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영화의 끝에 결국 매튜는 헬렌 수녀의 영적 안내를 받으며 사형 당합니다. 저는 매튜가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여기면서도 영화를 보고 나서 사형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저는 그 영화의 감독보다 요령 부득이라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의 오해를 완전히 해소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한번 시도해봅니다.
지난 글에서 밝혔듯이 저는 전자발찌 소급 부착에 대해 반대하자는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제 속내를 드러내면 만약 지금 바로 전자발찌 소급 부착에 대한 찬반 투표를 실시하면 아마도 찬성표를 던질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발찌를 찼던 한 흉악범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포기한 만큼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댓글에 그런 말씀을 하신 분도 있던데요, 자살한 남자가 외국 같으면 사형이나 종신형을 선고 받았을 것이라고요. 하지만 어찌됐든 우리 사회는 그에게 15년형을 선고했습니다. 일정한 기간 사회로부터 격리돼 죄를 반성하고 다시 복귀해 삶을 살라고 결정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사회에 다시 어울릴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그러니 혹시 전자발찌가 그런 기회조차 박탈하는 것 아닌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또 이는 꼭 '정의'의 문제인 것만은 아닙니다. 실용적으로 우리 사회를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출소한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는 최선의 방식인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과자들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방법론은 '교화'입니다. 처벌을 통해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복귀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죠. 하지만 전자발찌는 전과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겠다는 낙인을 찍는 의미가 내포돼 있어 앞서 말씀드린 이상적인 방법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나아가 사회적응을 하지 못한 전과자가 자포자기한 심정에서 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애당초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할 것이 아니라면 형을 복역한 뒤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둬야만 정말 사회적 안전이 보장되는 것 아닐까요?
저의 글은, 한 죽음을 통해서 전자발찌가 과연 최선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혹시 더 좋은 대안이, 적어도 전자발찌 제도를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지혜를 끌어낼 수 있을까 해서요.
영화로 논의를 시작했으니 영화 이야기로 끝맺을까 합니다. 미국의 하드코어 도색잡지 허슬러의 발행인을 영화화한 영화 '래리 플린트'에서 래리 플린트가 이런 말을 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밝힌 美 수정헌법 제1조가 나와 같은 쓰레기를 보호한다면, 여러분 모두는 물론 보장 받는 것이다."이 말을 차용하면 우리 사회가 그런 흉악범의 목숨과 삶까지 보호한다면 사회 전체적으로 좀더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는 곳이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