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는 바빴습니다. 성과없는 수고의 연속이었습니다. 팔자려니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요 며칠 제 머리와 가슴을 꽉 채우고 있는 장면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위 사진의 주인공은 스티븐 진우 킴, 한국명은 김진우입니다. 미국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미국 언론들은 contractor라는 표현을 쓰는데, 어떻게 보면 공무원이고 어떻게 보면 민간인 신분입니다. 즉, 미국 정부와 계약한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인데요, 하는 일은 자문역입니다. 그런데 그 자문의 대상이 핵 분야라고 하면 갑자기 레벨이 달라집니다. 김진우 씨는 그 정도로 지난 10년 동안 미국 정부를 위해 아주 중요한 일을 해온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김진우 씨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김진우 씨와 사적으로 알고 있는 다른 특파원 집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편한 옷차림의 그는 자기가 집주인도 아니면서 제가 있는 내내 열심히 고기와 소시지를 구워서 식탁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때 들은 그에 대한 얘기는 이 정도였습니다. "이 친구가 초등학교때 미국으로 이민 와서 조지타운대에서 학사, 하버드대에서 석사,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그날 헤어졌습니다.
그 뒤로는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난데없이 미국 언론에 그의 모습이 나타나더군요. 다름 아닌 국가기밀 유출이라는 어마어마한 혐의를 받는 피의자로 말이지요. 2006년인가 북한에 대한 제재를 앞둔 시점에 미국 fox news에 북한과 관련한 정보를 알려줬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FBI 조사과정에서 해당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위증을 한 혐의까지 추가됐다고 합니다. 유죄가 인정되면 기밀유출은 징역 10년형, 허위진술은 징역 5년형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 이민을 고민하고 결행한 대부분의 한국 부모들에게 자식은 그 이민의 절대적 이유입니다. 아이들만 잘될 수 있다면 본인은 미국 와서 어떤 고생을 해도 다 견뎌내는 게 한국 부모들입니다. 그런 한국 부모들에게 김진우 씨 같은 자녀는 완벽한 롤모델이 될 것입니다.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미국 학생들이 선망하는 대학을 골라 다니면서 어떻게 보면 완벽한 학력을 구축했으니까요.
더욱이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 에너지부, 국가안보위원회처럼 미국 정부에서도 중요한 부처로 손꼽히는 곳의 고위공직자들의 자문역할까지 한 전문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 그가 하루아침에 국가기밀 유출혐의로 법정에 서는 신세가 돼버렸습니다.
이 사진의 주인공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지난 2일 오후 네 시간 동안 미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디스커버리 채널 본사 건물인질극을 벌였던 제임스 제이 리라는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아버지가 한국인, 어머니가 일본인이라고 합니다.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만든 영상물 등을 보면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그 정도가 지나쳐 디스커버리 채널앞에서 이런저런 환경 관련 방송을 하라는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끝내 인질극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만들어 냈고,결국 경찰 특공대의 총을 맞고 현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질극이 종료된 뒤로 미국 언론들은 대부분 보도를 멈췄지만 일부 언론은 왜 그가 이런 행동을 했을까부터 도대체 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그가 인질극을 벌일 때 갖고 있던 총이 살상용 총이 아니라 신호용 총,즉 딱총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이씨에 대한 평가는 테러리스트에서 도움이 절실했던 정신이상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언론의 보도를 통해 조금씩 드러난 사실은 "그가 멕시코 국경에서 사람들을 불법 밀입국시키다가 잡혀서 실형을 선고받았었다, 2002년에 가까운 사람 2명이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조금 사람이 이상해졌다"는 정도였습니다. 미국에서만 발행되는 한국 언론과 인터뷰한 이씨의 아버지는 "어릴 적 영민하고 선하기만 했던 아들이 이혼후, 그리고 아내의 죽음 이후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혼자서 변해갔던 것 같다.미안하다."고 토로했습니다. 그의 고교 시절 친구는 이씨가 종종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씨는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이민을 온 다른 2,3세들과는 구분이 되는 측면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앞날이 창창할 것만 같았던 예일대 박사 출신의 한국인 2세, 43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고독·불행과 동반해야 했던 한국인 2세, 대조적인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기회의 나라로 불리웠고,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그렇게 인식되고 있는 미국 땅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고단함을 엿보게 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미국 주류사회로 진출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기에는 문득문득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경우, 피부색과 가치관·사고의 차이로 말미암아 어린 시절부터 어울려 지내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 등등 이 넓은 나라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산다는 게 그리 간단치는 않아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김진우 씨의 경우 10월에 두 번째 공판일정이 잡혀 있는데, 변호사 비용 같은 돈 문제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가 들립니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한국이든 미국이든 언론과의 접촉은 가능한 피하면서 재판부의 선처를 기대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결국 다음 공판 때 법원 앞에서 기다렸다가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속내를 기회가 되는대로 들어보고 싶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미국의 주류사회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말이죠.
그리고 제임스 제이 리씨의 사례는 저에게 지난해 4월 미국 이민센터에서 있었던 베트남계 미국인의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 그리고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기억하는 것 자체가 힘겨울 수밖에 없는 버지니아텍 총기 난사 사건까지 떠올리게 했습니다. 왜 그런 끔찍한 사건에 유독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한가운데 있는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기회의 나라, 아메리칸 드림으로 상징되는 미국이지만 이곳에서 흑백도 아닌 다른 피부색을 가진 한국계,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살아가며 겪는 어려움은 상상 이상일지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삶은 고단한 구석이 있게 마련이지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