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은 경술국치 꼭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날이죠(정확히 말하면, 강제병합 조약 체결을 공포한 날이라고 합니다).
이달 초에 출장차 일본에 갔었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조선은 대마도와 동격?
출장 마지막 날, 부산으로 출발하는 배를 타기 전에 쓰시마섬(대마도)을 돌아봤습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최익현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했던 지사입니다. 일본군에 대항하다 체포돼 쓰시마에 유배됐는데, 그곳에서도 적이 주는 음식이라 하여 단식을 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를 놓고도 일부 일본 학자들은 '단식을 한 게 아니다'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참 어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학술적으로 얻는 이득이 뭔지...
쓰시마에서 마지막으로 돌아본 곳이 바로 덕혜옹주의 결혼비였습니다. 얼마 전 책으로 출간돼 아시는 분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길가에 '조선왕가결혼비'라는 조그만 팻말이 써있었습니다. 입구를 지나 조금 걸어 올라가니 덕혜옹주결혼비가 서 있었습니다.
화창한 날씨였는데도, 외롭고 서글픈 느낌이 들었습니다. 덕혜옹주는 왜 일본 본토 등 다른 곳을 놓아두고 이곳 외딴 섬에서 결혼을 했을까.
동행했던 전 일본 총영사님과 교수님이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조선 말(당시 대한제국 말), 한일 강제병합을 앞두고 일제는 조선의 왕세자와 공주들을 일본으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인질의 성격도 있었고, 일본 교육을 받게 해 일본사람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덕혜옹주도 열 세 살 때 강제로 현해탄을 건너게 됐고, 일제는 덕혜옹주가 열 아홉 살이 되자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시켰다고 합니다.
하필, 왜 쓰시마 도주 후예냐고 물었습니다. 쓰시마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일본에서 가장 낙후된 곳이었습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왜구들의 소굴이었으니까요.
일행 중 한 교수님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로, 일본이 조선을 쓰시마와 동격으로 봤기 때문이라고...
◆비운의 삶
덕혜옹주는 1912년 고종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국권을 상실한 지 2년 뒤입니다. 어머니가 측실이어서 공주 대신 '옹주'라는 호칭이 뒤에 붙습니다.
일제는 옹주라는 이유로 왕족으로 인정하지 않다가 태어난 지 5년 뒤에야 인정했다고 합니다. 덕혜옹주를 아끼던 고종은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조선인과 약혼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곧바로 승하하고 맙니다.
덕혜옹주는 결국 1925년 일본으로 끌려가 도쿄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말이 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빠인 순종의 사망 당시, 일제가 허락하지 않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어머니가 죽자 열 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정신분열증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일본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9년 뒤 이혼을 당합니다. 15년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덕혜공주의 외동딸마저 유서를 남기고 실종됐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해 귀국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1962년 귀국했지만 20년 뒤에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모든 민초들의 삶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렇게 비운의 삶을 살다 간 공주가 또 있을까요? 고개가 절로 숙여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