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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가벼운 헌법…허울뿐인 임명제청권

국무총리 제도 자체의 필요성 냉정히 따져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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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총리 후보자에 대한 인사 청문회가 단연 화제입니다. 여당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많아지고 있다니 수일 내로 일단락 지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청문회에서 정말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났는데요, 김 후보자 자신에 대한 문제는 이미 충분히 기사화가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여기서는 국무총리의 장관에 대한 임명 제청권 문제를 돌아볼까 합니다.

헌법 제87조 제1항에는 "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8.8 개각에서 물러나는 정운찬 당시 총리는 이러한 임명제청권을 과거의 다른 총리들에 비교해 보더라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청문회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했던 민주당 박병석 의원에 따르면 청와대의 개각 발표는 일요일인 지난 8월 8일에 이뤄졌습니다. 총리와 관련 국무위원의 부서는 9일에 이뤄졌습니다. 박 의원은 총리의 임명제청권 행사 없이 개각 발표가 이뤄졌으므로 이번에 발표된 개각은 애초에 헌법 위반으로 무효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청와대와 총리실에서는 8월 8일에 청와대가 국무위원 후보자 명단을 발표하기 전에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대통령의 명을 받아 정운찬 당시 총리와 인선 내용에 관해 협의를 한 뒤 구두로 임명제청을 받았다는 겁니다. 헌법에 임명제청권 행사를 구두로 하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으므로 헌법 위반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임명제청권 행사를 총리가 직접 대통령에게 해야지 대통령실장을 통하면 안 된다는 규정도 없습니다. 대통령의 국법상의 행위를 문서로 하도록 한 헌법 규정은 있지만 총리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이 없습니다.

때문에 총리 인사청문특위 위원인 한나라당의 권성동 의원은 청문회 자리에서 "총리의 제청권 행사를 문서로 하라는 규정이 없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문서로 협의해도 되고 구두로 협의해도 되는 것 아니냐"고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국무총리가 국무위원 후보를 제청하도록 한 우리 헌법 조항은 대통령중심제라는 우리의 권력 구조와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장관을 임명하려는데 총리의 제청에 따라야 한다는 건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헌법학자들에 따르면 다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 헌법 규정은 순수 대통령중심제에 의원내각제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총리의 권한 강화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러한 헌법상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한다면 지금 헌법으로도 책임 총리제를 운영할 수 있을 정도라는 얘기지요.

어쨌든 우리 헌법은 형식적으로는 행정부를 통솔해야 하는 국무총리가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통해 함께 일할 국무위원들을 대통령에게 추천하고, 이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장관 후보를 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인선 발표는 제청이 있은 뒤에 이뤄져야겠지요.

그런데 이런 임명제청 문제는 오랜 기간동안 사실상 요식행위로 여겨져 왔습니다. 워낙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하니까요. 자기가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국무총리가 함께 일할 국무위원 선정에서 실제 발언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선다는 게 애초에 가당치 않은 측면도 있었습니다.

조금 과거를 돌아볼까요? 2003년 7월 어느날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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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건 총리가 농림부 장관을 서면으로 임명 제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사상 처음'이랍니다. 이른바 임명제청권의 '서면 행사'의 역사는 아직 10년도 되지 않은 셈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제청권의 존중을 위해 당시에는 총리가 직접 청와대 관계자들과 함께 장관 후보자들을 면접한 뒤 인사보좌관을 통해 서면으로 국무위원 제청서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임명제청권 행사를 제대로 보장받았던 고건 총리는 나중에는 임명제청권을 편법으로 행사해 달라는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바로 다음해인 2004년 5월에 일어난 일입니다. 청와대는 조기 개각을 위해 물러나기로 한 고건 총리에게 청와대가 교체 의사를 밝힌 부처의 새 장관들을 임명 제청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1년 전, 임명 제청권의 실질적 보장을 홍보하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죠. 하지만 고 총리는 끝까지 임명제청권이라는 제도의 도입 취지를 거론하며 제청을 거부합니다.

거듭된 청와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임명제청권의 실질화를 주장한 고건 총리 덕분에 후임 총리가 새 장관들에 대한 임명제청을 하게 됩니다. 임명제청권 역사에서 고건 총리가 차지하는 역할이 정말 컸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새 총리가 직접 장관 후보들 면접을 봤다는 기사는 못 찾았습니다. 이런 게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입니다. 뜻은 좋은데 실질과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고건 총리의 2003년 서면 제청이 사상 처음이었다면 그 전에는? 당연히 구두로 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참여정부에서의 이런 제청권의 서면 행사, 제청권의 실질화 논의를 통해서 국무총리의 제청권 행사가 아무리 요식 행위라도 그러한 요식 절차는 제대로 지키려는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구두 제청이라는, 그것도 일요일에 갑자기 전화를 받고 명단을 통보받고는 '제청한 걸로 하자'는 식의 제청이 이뤄진 것입니다.

정 총리가 좀 헌법 원칙에 엄격했더라면 자신은 물러나기로 한 만큼 후임 총리를 먼저 선출하고 그로 하여금 새 장관들을 제청하도록 하는 것이 옳았을 겁니다. 하지만 정 총리 또한 그런 원칙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총리실의 발표대로 휴일에 전화를 받고 제청한 걸로 하는 융통성을 발휘한 것을 보면 말이죠.

헌법에 있는 당연한 권리, 그것도 정부 조직에 관한 중요한 절차가 이렇게 속된 말로 엿장수 맘대로 운영된다는 건 참으로 황당한 일입니다. 법과 원칙, 공정한 사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등의 수사가 의미를 가지려면 이런 절차들부터 존중할 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는 절차가 기본이라는데, 헌법에까지 규정해놓은 절차를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총리를 그저 얼굴마담 정도로 여기는 현재의 제도는 이제 정리할 때가 됐습니다. 총리를 임명하는 이 복잡한 절차에 비해 도대체 어느 정도나 실질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십니까? 기껏해야 1년 남짓 자리에 앉아 국면 전환용으로 활용되는 게 현재의 국무총리 제도의 현실 아닌가요?

이런 총리가 도대체 왜 필요한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실질적으로 행정부를 통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든지, 대통령을 보좌하는 넘버 2로서의 자리가 필요하다면 미국처럼 대통령과 함께 팀을 이뤄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부통령을 두는 게 차라리 나아 보입니다. 언젠가 헌법이 개정된다면 이 문제부터 해결됐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만약 김태호 후보가 낙마한다면, 그런데 또 다른 장관 후보자들도 일부 낙마한다면 그 후임은 누가 임명 제청을 해야 할까요? 현재 총리 권한대행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헌법상의 중요한 권한이라는 국무위원 제청권을 권한대행이 행사해도 될까요? 이번에는 청와대도 고민이 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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