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지방선거에서 여론조사로 인해 손해를 본 정당은 어디일까요? 지금 여론조사가 틀렸다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민주당일까요? 조금 역설적이긴 합니다만 저는 오히려 한나라당이 더 큰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압승할 거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믿고 자만했던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사고가 터졌습니다. 5.18 행사장에 근조 화환이 아니라 축하 화환이 정몽준 당시 대표 명의로 배달된 것이나 여권 인사들의 실언도 시리즈로 이어졌습니다. 급기야 선거 직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공개적으로 욕설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방심했다는 증거들이죠. 낙승을 예상하고 선거 이후에 지금 추진하던 정책들을 흔들림 없이 밀어붙이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선거가 치열한 접전 양상으로 나타났더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어쨌든 저는, 적어도 정치권은 여론조사에 대해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여론조사를 가장 많이 하는 곳도 정치권이고, 또 가장 맹신하는 곳도 정치권입니다. 세상에, 자기 당의 선거 후보를 여론조사로 정하는 정당이 한나라당이고 민주당입니다. 그 여론조사는 특별한 걸까요? 아닙니다. 때로는 대형 여론조사 기관을 피한다고 오히려 신뢰도가 떨어지는 중소 여론조사 기관에 조사를 맡기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 사례를 들어보지요. 이번에 서울시장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낙선한 한명숙 후보가 어떻게 시장 후보가 됐습니까? 민주당은 후보 결정을 100% 여론조사에 의존했습니다. 공개 토론도 없었고 당원들의 투표도 없었습니다. 한 후보가 토론 등을 원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사회적인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오랫동안 서울시장 선거를 준비해왔던 이계안, 김성순 예비후보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되는 방법이었지요. 김성순 예비후보는 아예 경선을 포기해버렸습니다.
때문에 이번 서울시장 선거는 원희룡, 나경원 의원 사이의 후보단일화에 이어 TV 토론과 공개 경선을 거쳐 선정된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와 당내 토론회 한 번 없이 조용히 여론조사로 후보가 된 한명숙 후보와의 싸움이 됐습니다. 민주당은 여론조사를 100% 신뢰해서 그걸로 서울시장 후보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언론사의 여론조사는 정확성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민주당으로서는 먼저 자신들의 후보 선정을 위한 여론조사는 문제가 없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역시 크지 않은 차이로 진 경기지사 후보 단일화 과정도 그렇습니다. 민주당의 김진표 예비후보를 누르고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전 장관이 후보가 된 것은 결국 여론조사에서의 근소한 우위였습니다. 유 후보는 국민참여 경선에서는 졌지만 여론조사에서 6.08% 포인트 앞섰고, 때문에 정당지지율 3%도 안 되는 당으로 단일화가 됐습니다. 그 여론조사는 정확했던 걸까요?
한나라당도 여론조사에 대한 맹신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원희룡, 나경원 의원 사이의 후보 단일화도 사실상 여론조사로 결정됐습니다. 이미 한국 정치권에서는 당연하게 되어 버린 관행대로 본 경선 역시 여론조사를 반영해 치러졌습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명박 대통령을 탄생시킨 17대 대선에서도 각 정당은 여론조사를 갖은 방법으로 경선에 반영했습니다. 과연 정당이 선거에 내보낼 후보를 정하는데 당원들의 뜻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여론을 반영한다는 게 맞는지 의문입니다. 더구나 정확성이 그렇게 떨어진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말입니다. 이것이 민주적 원칙에 맞는 것인지 정말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겁니다.
언론도 여론조사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지금의 여론조사에 대한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딱 그만큼의 신뢰를 부여해서 보도를 해야겠지요. 특히 여론조사가 제대로 민심을 짚어내고 있는지에 대한 확인 취재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여론조사가 현장 취재를 압도하는 현실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더구나 이번 YTN의 경우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합니다. 대규모 출구조사로도 정확성을 자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거 직후의 예측조사를 그렇게 해도 괜찮은 것이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결국 부정확성이 여러 번 드러난 정치 여론조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지금과 같은 보도가 언론 윤리의 측면에서 문제는 없는지, 이건 정말 관련된 언론인들이 머리 싸매고 고민할 대목입니다. 국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론조사 결과는 국가의 정책 결정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전화 한 번 잘못 대답하면 그게 고스란히 우리 모두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일부 언론이 여론 조사를 가지고 여론 조작을 했다느니 하는, 마녀 사냥식 비판에 매달리기 보다는 좀 더 냉철하게 이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PS. 여론조사와 관련해서 너무 변명만 늘어놓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제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론조사를 담당했던 것도 아니고 또 여론조사 기관하고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니까 오해는 마시길. 다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예측조사를 제외한 일반 정치 여론조사를 담당한 뒤로 여론조사 방법이나 특성 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