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워싱턴 특파원의 하루 일과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국무부 대변인의 브리핑 내용을 따라가는 일입니다. 현재 대변인은 크롤리,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사람 좋은 인상을 풍기는 미국인이죠.미국의 진보를 위한 센터에서 국내 안보 문제를 담당하는 책임자로 있다가 지난해 5월에 국무부 대변인으로 임명됐습니다.
크롤리 대변인은 특히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한 이후로 미국 정부의 생각을 알리는 유일한 창구 역할을 해왔습니다.하지만 한국 정부의 조사결과가 발표되기 전까지 크롤리 대변인은 신중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조사가 진행중이고 아직 우리는 조사결과를 알지 못한다. 어떤 예단도 불필요하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 특파원들은 크롤리의 말 한마디, 단어 하나를 갖고 "미국 정부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됐다."느니 "미국정부와 한국 정부의 인식에 미묘한 차이가 나타났다."는 식으로 자기 해석을 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브리핑은 김정일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크롤리 대변인은 "천안함 조사결과가 6자회담 재개 이전에 나올 것이다."는 말을 했습니다. 김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해서 6자회담 복귀 선언을 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던 때였습니다. 즉, 6자회담에 대한 북한의 생각이 하루이틀 사이에 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천안함 조사결과가 먼저 나올 것이라고 얘기한 거죠.
저는 "미국 정부가 천안함 조사결과를 보고 나서 6자회담에 대한 태도를 정하겠다."는 메시지로 봤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다른 언론사들은 "미국 정부가 여전히 6자회담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뜻으로, 이는 천안함 조사결과를 보고 6자회담에 대한 태도를 정해야 한다는 한국 정부의 접근방식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다행스럽게도 제 해석이 맞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당시 저는 미국 정부 당국자 한 사람의 입만 바라보고 사는 (조금 극단적인가요?) 특파원 신세에 약간의 슬픔같은 것들을 느꼈습니다. 하여튼 신중한 기조를 유지하던 크롤리 대변인이 조사결과가 발표되자 북한에 대한 공세의 포문을 열더군요.
발표결과가 알려진 날 크롤리 대변인의 브리핑 내용중 일부입니다. "천안함 사건은 한국에 대한 북한의 침략행위입니다. 이번 사건은 북한의 심각한 도발로, 분명한 결과들이 있을 것입니다. 도발행위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결과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가(국제사회가) 취할 수 있는 일련의 조치들이 있고, 우리 자신의(미국 독자) 권한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이 있습니다. 미국은 금융분야 와 다른 분야에서 독단적으로 조치들을 취할 권한을 갖고 있고, 북한에 명백한 신호를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할 것"입니다.
마치 조사결과 발표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많은 말들을 쏟아 붓더군요. 책임있는 정부 당국자의 태도로는 괜찮아 보입니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극히 신중하되, 결과가 나온 뒤에는 분명하게 태도를 정리하는 것 말이죠.
그런데 이 날 브리핑 내용중 제 인상에 깊이 남은 대목은 따로 있었습니다. 어느 기자가 "북한이 조사결과를 부인하면서 한국에 자체 검열단을 보내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자 크롤리 대변인이 갑자기 웃음을 짓더니 "북한이 조사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잃어버린 어뢰가 어디 있는지를 찾기 원한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죠."하고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다른 외신 기자들도 덩달아 웃고요. 웃음이 갖는 의미는 분명 냉소였겠죠. 이렇게 국제조사단이 참여한 가운데 북한의 행위라는 나름 분명한 증거들이 나왔는데, 무슨 자체 검열단이냐 하는 뜻 같았습니다.
하지만 미 국무부 대변인과 외신기자들의 웃음과 소리를 보고 들으면서 저는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습니다. 국제적인 조롱거리로 전락한 북한의 처지가 가여웠고,어쩔 수 없이 국제사회에 우리 자신의 운명의 상당부분을 의존해야 하는 한국의 상황이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남북교류 전면 중단이라는 한국 정부의 강수에 미국 정부가 동조하며 북한에 대해 단호한 목소리를 내면 낼수록 사용가능한 경우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결국 외통수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이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할 지 이제 또 지켜봐야 할 시간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