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이은 남극 항해 결산 10문 10답 - 제2편입니다.
앞에서는 남극 항해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신 질문 위주로 문답을 구성했다면,이번에는 아라온호의 쇄빙 시험을 집중적으로 다뤘습니다.
++++++++++++++++++++++++
문6) 아라온호의 쇄빙 능력은 어땠나요?
이번 블로그에서 처음 자세히 말씀드리지만, 직접 지켜본 아라온호의 쇄빙 능력은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것보다도 훨씬 더 저조했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라온호의 쇄빙 능력 자체보다는 운용에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라온호가 첫 쇄빙 테스트를 실시한 것은 지난 1월 26일, 그러니까 첫 목적지인 케이프 벅스에 도착한지 4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아라온호는 케이프 벅스에 대륙기지정밀조사단을 내려준 뒤 쇄빙 시험 조건에 적당한 얼음을 찾기 위해 인근 바다를 잠시 헤매고 다녔습니다.
쇄빙선 아라온호가 이번 시험에서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은 'Polar 10' 줄여서 'PL10'이라 부르는 가장 기본적인 쇄빙선 시험 항목이었습니다.
(그 밖에 '전진 중 30도 회전, 후진 중 45도 회전, 출력 85%로 전진 등 15가지 항목이 있었지만, 필수적인 항목은 아니었고 결국 대부분 시도하지 못해 이후 언급에서는 제외하겠습니다.)
그 조건은
'설계 흘수 6.8m에서 1m 두께의 다년생 얼음을 시속 3노트(약 5km)로
연속해서 쇄빙할 수 있는 능력'
입니다. (추진모터 출력 : 1만kW(최대치)) '설계 흘수 6.8m'란 배가 물에 잠기는 깊이를 말합니다.
만약 배에 짐이 많이 실려 있으면 무게 때문에 더 깊이 잠겨 흘수가 6.8m보다 커지고, 반대로 배가 가벼우면 흘수가 6.8m보다 작아집니다.
'1m 두께의 다년생 얼음'이란 최소 1m 이상의 두께를 가진, 몇 년에 걸쳐 형성된 평평한 얼음을 말합니다.
이런 조건의 얼음을 평균 3노트의 속도로 멈추지 않고 최소한 500m 이상 깨고 나갈 수 있어야 합격입니다.
하지만 첫 시험에서 아라온호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나중에 극지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는 수치가 조금 더 상향돼 있지만, 당시 아라온호는 불과 1노트의 속도를 내는데도 실패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조건에 맞는 얼음을 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남극의 여름 동안 작은 유빙들은 모두 녹아버리고, 아주 오랫동안 두껍게 다져진 큰 빙산만 남아 바다를 떠돌기 때문에 쇄빙 기준처럼 '두께 1m로 500m 이상 펼쳐진 얼음층'을 찾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동행한 러시아 얼음 전문가들은 "처음부터 남극의 여름에 온 것이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27일 시도한 두 번째 시험은 느린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매우 위험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끝까지 지켜 본 취재진들은 이날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오전 9시께 선장이 러시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측정 없이) 단독판단으로
정박지 근처의 얼음을 깨보려고 시도했으나 얼음의 일부만 깨지고 쇄빙에는 실패.
이 과정에서 선체 외벽 안쪽으로 부착된 충격 센서가 작동돼 경보음이 일시적으로 울렸다고 함.
경보음에 대해 STX POS(아라온 운영사) 관계자들은 이 센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경보음을 무시했다고 함. 나중에 측정해본 결과 얼음만 5m이상, 눈층이 2-3m 사이였음.>
(아라온호가 쇄빙을 시도했다 큰 충격을 받고 포기한 얼음. 뱃머리의 페인트가 벗겨져 묻어 있습니다.
수면 위로 나와 있는 얼음과 눈 두께만 2m 가까이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시행착오는 쇄빙 경험이 전혀 없는 선장의 판단 미스 때문이었습니다.
경보음이 울린 것은 배를 건조한 한진중공업 측의 설계 결함이 원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아라온호의 쇄빙 능력 범위를 벗어난 두꺼운 얼음층에 무리하게 배를 들이받았다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아라온호의 2차례 쇄빙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SBS를 비롯한 탐사 기자단은 서울로 긴급 보고를 전송했습니다.
다음날 방송과 신문 등 많은 언론매체는 '아라온호 쇄빙 실패'라는 기사를 실었고, 당황한 극지연구소 측은 '실패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해명자료를 냈다가 나중에는 2차례 모두 실패였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라온호가 'PL10'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이틀 뒤 3번째 시험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잇따라 두 차례의 쇄빙 시도가 모두 완전한 실패로 끝나자, 아라온호가 택한 방법은 '배 무게를 줄여 속도를 높인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즉 3차 시도를 이틀 뒤인 29일로 잡고, 28일은 배의 하중을 분배하고 선내의 화물 위치를 재조정하는데 하루를 꼬박 투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배 바닥에서 무게를 잡아주던 물 800톤(이를 ballast라고 합니다)을 모두 버리고, 배의 앞뒤 무게를 비슷하게 맞춰 배가 앞이 들리지 않고 수면과 평행을 이루도록(이를 even keel이라고 합니다) 조정했습니다.
(쇄빙 시험이 한창인 아라온호 선교(bridge, 조타실)에 모여 있는 항해사들. 긴장된 표정이 역력합니다)
그렇게 하루를 투자한 끝에 마지막 시도라고도 할 수 있는 29일이 왔습니다.
아라온호가 케이프 벅스에 도착한지도 이미 일주일이나 됐기 때문에, 이번 시도에서도 쇄빙 조건 만족에 실패한다면 다음 일정 때문에라도 결국 이후는 포기하고 두 번째 목적지인 테라노바 베이로 갈 수 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 빠질 위험이 컸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시험에서는 하늘이 아라온호의 편을 들었습니다.
고심 끝에 선정한 얼음층 위로 천천히 아라온호가 진입하는 순간부터 최소 3노트의 속력을 내기 시작하더니 점차 속도가 붙어, 나중에는 최고 4노트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목표 구간인 500m를 모두 일직선으로 깨고 나가자, 관계자들이 모여 상황을 지켜보던 선교(bridge, 조타실)에 '해냈다!'는 환호성이 가득 찼습니다.
쇄빙 속도는 나중에 정확한 계산을 거쳐 보정됐지만, 쇄빙 당시에도 평균 3,5노트 이상을 계속 유지해 기준인 3노트를 충분히 넘을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극지연구소가 발표한 공식 속도는 3.5노트였습니다)
이날 함께 실시한 후진 테스트에서도 아라온호는 약 2노트의 속력을 보였는데, 후진이나 선회 항목의 경우 'PL10' 기준에 포함돼 있지 않아 큰 의미는 없었습니다.
아라온호는 이후 테라노바 베이 인근 해역에서 한두 가지 사소한 쇄빙 항목 시험을 마친 뒤 남극을 떠나 뉴질랜드로 귀환했습니다.
그러나 극지연구소는 처음 두 번의 실패를 한 번으로 축소하려고 해 뒤늦게 기자들의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뒤 2월 20일 오전에 열린 선상 보고회에서, 극지연구소 측은 26일의 실패를 시도로 아예 인정하지 않고, 27일 한 번만 실패한 것으로 발표했습니다.
(당시 발표 속도는 1.03노트. 기준에 미달한 수치임에는 분명하지만 실제 목격된 속도보다 높아졌습니다)
또 쇄빙 시험 중 배에 가해진 최대 응력(압력)이 59.2MPa로, 선체의 허용 응력인 355MPa보다 적어 배는 안전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허용 응력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수치일 뿐, 이 수치의 절반에 해당하는 힘만으로도 배가 부서지거나 금이 가는 일이 실제로는 비일비재합니다.
(실제로 59.2MPa라는 압력은 무려 584기압에 해당하는 엄청난 압력입니다)
정확히 어떤 충격이 가해졌고, 배의 어느 한 곳이라도 스트레스로 변형된 곳이 없는지는인천항에 도착해 정밀 점검을 받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쇄빙 시험 중 고장을 일으킨 발전기. 총 4대가 설치돼 있으며 쇄빙 시험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이 발전기 4대를 풀 가동해야 합니다)
아라온호는 오는 3월 15일 인천항에 입항한 뒤 한동안 수리와 보급, 클레임 해결에 들어갑니다.
현재까지 접수된 배의 클레임만 50여건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는 쇄빙 시험 도중 배의 출력을 100%로 올리는 과정에서 고장난 발전기 4대 중 1대의 수리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같은 배의 결함을 모두 해결하고, 남극에서 보여준 미숙한 운용을 대폭 보완하지 않는다면 오는 7월 북극 항해 역시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실패를 실패로 인정하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던 극지연구소 측의 무책임한 대응도 앞으로 계속 안전한 항해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선돼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