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전유물, 스피드 스케이팅 장거리
동계올림픽은 이번 밴쿠버 대회가 21번째다. 1924년 프랑스 샤모니에서 첫 대회가 열린 , 지금까지 2311개의 메달이 주인들을 찾아갔다. 그렇다면 동계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딴 나라는 어디일까?
정답은 노르웨이다. 98개의 통산 금메달과 280개의 전체 메달 개수 모두 역대 최다다. 하계올림픽의 절대강자 미국(통산 2295개의 메달로 1위. 현존 국가 가운데 2위인 영국의 715개보다 3배 넘게 앞서 있다)도 동계올림픽에서 노르웨이를 따라잡으려면 갈 길이 멀다. 아직 216개에 불과하다.
사실 당연한 현상이다.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구 국가들의 '생활 스포츠'가 동계올림픽의 주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회 대회 때부터 정식 종목이던 '바이애슬론'과 '노르딕 복합'의 경우, 유례 자체가 노르웨이 군인들의 훈련 방법이었다. '군대식 족구'나 '제기차기'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었다면, 우리나라의 메달 개수도 꽤 늘어났을 것이다.
스피드 스케이팅도 마찬가지다. 신발에 동물의 뼈로 만든 블레이드를 붙이고 꽁꽁 얼어붙은 강과 호수, 운하 위를 미끄러져 이웃 마을을 오가던 과거 북유럽의 생활이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이어졌다. 동계올림픽에서도 이들 '전통의 강호'들의 성적이 압도적이다. 500미터와 1000미터 같은 단거리 종목들은 최근 들어 한-중-일 등 아시아 선수들이 순발력을 무기로 좋은 승부를 펼치고 있지만, 장거리 종목인 5000미터와 10000미터는 아시아 선수들에게 '올려보지도 못할' 나무였다. 역대 올림픽 장거리 종목 메달의 주인들은 이랬다.
한 마디로 북유럽의 독무대였던 스피드 스케이팅 장거리 종목. 여기에 조용한 '혁명'을 준비하는 한국인 청년이 있다.
올림픽 출전을 위한 도박쇼트트랙 선수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국제대회보다 국내 대표 선발전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워낙 선수층이 두껍기 때문에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안심할 수가 없다. 밴쿠버 올림픽 출전선수를 결정한 지난해 4월 대표 선발전에서는, 그 직전까지 여자 대표팀의 주축을 이루던 선수들이 대부분 탈락했다. 남자부는 원래 대표팀의 주력 선수들이 대부분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한 명의 예외가 있었다. 그 직전 중국 하얼빈에서 열린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3관왕에 오르며 차세대 에이스로 기대를 모으던 이승훈이었다.
"올림픽에 정말 나가고 싶었는데, 그래서 긴장을 했었나봐요. 첫 번째 레이스에서 넘어졌어요. 나머지 선수들이 너무 잘 탔고, 결국 만회할 기회가 안 왔어요."
3개월 동안 방황하던 이승훈에게 색다른 가능성을 제시한 사람은, 네 번의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을 맡으며 11개의 금메달을 수확했던 ‘한국 쇼트트랙의 대부’ 전명규 한국체육대학 교수였다.
"승훈이는 원래 선수 생활을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그 나이 대 최고였었지요. 스피드 스케이팅의 감각이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순발력보다는 지구력이 나은 스타일상 장거리가 어울릴 거라고 추천했지요."
'올림픽에 가고 싶다'는 희망만으로 새로운 길로 들어선 순간, 좋은 예감이 찾아왔다.
"처음 스피드용 스케이트를 신고 태릉국제빙상장 트랙을 도는데, '아, 해볼만 하다'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쇼트트랙보다 3배 넘게 긴 코스인데도 힘이 들지가 않았어요."
스피드 스케이팅용 '롱 트랙'의 한 바퀴 길이는 400미터. 쇼트트랙용 코스는 112.12미터이다. 그런데 두 코스 모두를 타 본 선수들은, 한 바퀴를 도는데 소모되는 에너지가 비슷하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쇼트트랙이 길이는 짧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코너를 도는데 체력이 많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롱 트랙에서 둥근 코너 부분의 반지름이 23미터인 반면, 쇼트트랙은 8미터다. 짧은 거리와 시간 안에 180도를 회전해야 하기 때문에, 다리에 주는 부담이 훨씬 크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거리와 시간을 스케이팅 할 경우, 롱 트랙보다 쇼트트랙의 운동량이 훨씬 많다. 쇼트트랙계에서도 지구력이 최고라고 인정받던 이승훈이었기에, 5000미터와 10000미터가 체력적으로 부담스러울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과연 실전에서 어떤 기록이 나올 것인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시즌이 시작되자, 놀라운 기록행진이 펼쳐졌다.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 처음 나선 10월 대표 선발전 5000미터에서 6분 48초 00의 대회 신기록을 세우며 월드컵 시리즈 출전권을 손에 쥐었다. 월드컵 2차대회에서는 6분 25초 03으로 한국 기록을 갈아 치웠다. 고지대의 빙질 좋은 경기장으로 장소를 옮기자 기록 단축 속도는 더욱 가팔라졌다.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4차대회에서 6분 16초 75, 미국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5차대회 6분 14초 67로 한국 신기록 행진을 이어갔다. 한 달 사이에 한국 기록이 13초 82나 앞당겨진 것이다.
기록보다 더 놀라웠던 건 경기내용이었다. 이승훈은 1차대회 때만 해도 하위권 선수들이 나서는 '디비전 B'에서 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월드컵 시리즈 막판에는 최상위권 선수들을 위협했다. 4차와 5차대회에서는 밴쿠버 올림픽 최고 스타로 각광받고 있는 미국의 샤니 데이비스를 따돌렸다. 3년 넘게 장거리 종목의 절대지존으로 군림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크라머와 격차도 5초까지 좁혔다. 1월 아시아 선수권에서는 오랜 세월 아시아 최강으로 군림해 온 일본의 히라코 히로키를 10초 가량 따돌렸다. 세계 3-4위권의 선수들과는 이제 접전을 펼치고 있다.
'아시아 빙상의 신화'에 도전한다전문가들은 이승훈이 이렇게 빠른 적응을 보인 이유로 체력과 함께 쇼트트랙에서 다져진 코너링 능력을 꼽는다. 위에 써놓은 대로 롱트랙보다 훨씬 어려운 쇼트트랙의 코너를 쉼없이 돌다보니, 롱트랙의 코너에서 속도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승훈은 5일 밴쿠버에 입성하기 직전까지 쇼트트랙 훈련을 병행했다. 이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승훈의 가장 큰 장점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용감하게 뛰어든 정신력일 지도 모른다.
"주변에서 모두들 아시아 선수는 힘든다고 하는데요,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쇼트트랙도 우리나라가 처음부터 세계 정상이었던 건 아니었잖아요? 그리고 쇼트트랙도 단거리보다는 장거리가 더 강하잖아요?, 나는 할 수 있다, 쇼트트랙도 했는데, 정상에 서 봤는데, 스피드도 할 수 있다. 한 번 보여주자는 생각이에요"
이승훈은 개막식 다음 날인 (한국시간) 14일 오전 5시에 시작되는 남자 5000미터 경기에 출전한다. 1년 전까지 자신이 속했던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이, 가장 확실한 '금밭'인 1500미터에 출전하기 약 3시간 전이다. 본인은 16위까지 주어지는 10,000미터 출전권을 따내는 게 목표라고 말한다. 주변에서는 최정상급 선수와 같은 조에 편성돼 페이스를 끌어올릴 경우, 아시아 선수 최초의 메달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남들이 '도박'이라 불렀던 이승훈의 '모험'은 '신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